▲ 정상환 (행복커뮤니케이터·하이닉스반도체 사외이사)
이처럼 다양한 쓰임새도 드물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에 유용한 수면 유도제로, 때늦은 식사를 위한 냄비 받침대로, 벽지 색깔에 맞춘 인테리어 용품으로, 지적 이미지 연출을 위한 소품으로, 그리고 극히 일시적 용도지만 구타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 바로 책이다.

책의 용도가 개인마다 다를지라도 그 바탕은 역시 '갈구(渴求)'에서 비롯될 것이다. 세상살이의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한 것, 그것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바람도 서늘하여, 새삼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펼칠 궁리를 해보지만 스며든 게으름을 좀처럼 떨치기가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독파(讀破)'보다는 '검색(檢索)'에 익숙한 습관 때문이다. 덧붙여 순수한 읽는 즐거움보다는 실용성을 앞세운 가벼운 책 읽기의 얄팍함 때문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분들이 있다.

H 선생은 책 읽기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분이다. 짬만 나면 책을 읽는 분이다. 다독가(多讀家)다. 명문대 법대를 졸업하고, 법무부 차관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60대 후반 임에도 변호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법조계 명망가다. 책을 써도 몇 권을 쓸 해박함이지만 법학 관련 서적부터 잡문에 이르기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피곤에 지친 해외 출장길에서도 족히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영문서적을 돋보기에 의지하여 틈만 있으면 펼친다. "어찌 그리 책을 좋아하십니까?"하고 여쭈면 "습관이지요 뭐…" 라고 그냥 미소를 지을 뿐이다.

일전 이 분에게 필자의 잡글을 담은 졸저를 부끄럼을 무릅쓰고 건넨 적이 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보잘 것 없는 이 졸저를 처음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고 다 읽은 몇 안되는 분중에 한 분이다. 사실 지인의 저서를 건네받고 완독한다는 것은 내 경우, 웬만한 성의로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분은 저자에 대한 예의와 책에 녹아있는 경험 그리고 가치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는다. 자그마한 체구에 백발이지만 (요즘 말로) 포스가 느껴지는 이유다. 다독(多讀)의 힘이다.

S 선생의 경우는 낭만파 독서가다. 철학과를 졸업하고 신문기자 출신의 언론인으로 필자가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가까이 모셨던 분이다. 60세 이후 새로운 돈벌이에 나서지 않겠다는 선언(?)후 지금은 북한강변에서 농사를 지으며 야생화 사진을 찍고 있다. 더불어 대학에 출강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신문 잡지에 글도 기고하며, 'FROM 60'이라는 인터넷 카페 운영에 열심이신 분이다. 평소 말씀은 간결하고 깔끔하지만, 소주 한잔 앞에 두면 서양 문화사부터 인사동 뒷골목의 유래까지, 그 분의 말씀을 듣노라면 막차 시간을 훌쩍 넘기는 수가 많다.


이 분의 지적 해박함과 세상을 보는 혜안은 물론, 책 읽기에서 비롯된다. 소위 필이 꽂히면 특정 분야의 책 읽기에 한 동안 집중한다. 경제·역사분야에 몰두하면 대학 전공자들도 완독을 포기하는 원서를 독파한다. 후배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젠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끝까지 다 읽었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일선에서 물러나신 분들은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지만 현실과 접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현실에 적용이 가능한 분들은 바쁜 일상때문에 한가롭게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이럴 경우 필자의 알량한 요령(?)에 비추어 '서가산책'을 권한다. 즉 가까운 '서점가기'다. '술을 가까이 하면 술 냄새가 나고 책을 가까이 하면 책 향기가 난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고나 할까? 도서관의 엄숙함보다는 자유롭고, 가벼워서 좋다. 책 숲을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느낌.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막 출간 된 책들의 파닥거림이 좋다. 깔려있는 책 제목만 보더라도 현재의 사회적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 약력과 서문 그리고 에필로그만 슬쩍 들추어 보더라도 마치 한 권을 다 읽은 것같은 뿌듯함을 느낀다. 완독, 정독의 기쁨은 누리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정보와 지식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다. '검색(檢索)' 시대에 걸맞은 독서법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중학교 시절부터 매번 방학때면 도전했던 '삼국지' 읽기를 마무리 한 것은 만화가 고우영의 '삼국지'다. 그리고 대학시절 의식(?)있는 학생이 되기 위해 시도했으나 아직도 끝내지 못한 책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다.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한 책이 왜 이리 어려운지… 번역의 난해함만을 탓하고 있다.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원천은 인쇄공이었던 그의 할아버지가 모아두었던 200여권의 고전서적이라 한다. 어린 손자 에코는 이 책을 독파하고 성장하며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고 최고의 지성이 되었다. 비록 수면유도제일지라도, 냄비받침일지라도, 인테리어 용품일지라도, 이미지용 소품일지라도 좋은 책을 가까이 두어야 하는 이유다. 나의 손자가 이 책을 통해 위대한 인물로 탄생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