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오후 인천 옹진군 영흥도 해군전적비에서 열린 '제61주년 해군첩보부대 X-RAY 작전 특수임무 14위 전사자 추모식'에서 특수임무유공자 회원 등 참석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김범준기자

"그대들의 젊음을 바친 인천상륙작전, 그 뜻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14일 영흥도 해군전적비 앞.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해군 군악대의 진혼곡이 울려 퍼졌다. 추모사를 낭독하는 함명수(87) 7대 해군참모총장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인 1950년 8월16일. 당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소령이던 함명수 총장에게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수원·서울 등에 잠입해 첩보수집을 담당하라'는 임무를 하달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작전명 'X-RAY', 함 총장과 16명의 대원은 이틀 뒤인 18일 새벽 1시 첩보선 백구호와 보조선 수양산호에 몸을 실었다.

영흥도에 도착한 것은 24일 새벽 1시30분. 김순기 중위, 임병래 소위, 장정택 소위를 중심으로 3개조가 편성됐다.

2개조는 직접 인천·수원·서울에 침투했다. 월미도 방어진지 건설 인부로 일하기도 한 대원들의 정보는 상륙작전을 검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9월 1일 미 극동군사령부 클라크 대위가 영흥도에 상륙했다. 이들의 정보는 그대로 미군에 보고됐고, 13일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철수는 쉽지 않았다. 한국해군부대가 있다는 것을 탐지한 인민군이 14일 대부도와 선재도를 통해 영흥도로 건너와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임병래 소위 조 6명과 청년의용대원 30여명이 교전을 펼친 뒤 다른 대원을 탈출시키고 임 소위와 홍시욱 대원이 남았다. 비밀 유지를 위해 이들은 마지막 남은 총알로 자결했다.

이들을 이끌었던 함 총장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다시 영흥도를 찾아왔다. 그가 부르는 전우의 이름은 떨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수도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태극기를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날 추모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함 총장의 말에 숨을 죽였다. 행사에 참석한 조윤길 옹진군수, 이승준 인천해역방어사령관은 묵묵히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추모식을 주관한 특수임무수행자회 인천지부 정희철 지부장은 "처음으로 해군에서 정식 행사로 추모식을 진행해줘 뜻깊게 생각한다"며 "상륙작전의 숨은 주역인 해군첩보부대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그 뒤를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홍현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