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후반 한국 근대사가 일제 식민지로 귀결되었기에 이 시기 한국 역사는 명백히 실패한 역사이다. 그러나 19세기는 제국주의시대였다. 아시아 국가 중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터키, 태국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식민지를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식민지화가 한국만이 특별히 부족하거나 못나서 겪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기에 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의 역사 대응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래서 이를 탓할 수는 있으나, 마치 우리 국가의 대응만이 특별히 잘못되어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자조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19세기 후반 역사에 대한 평가를 치욕스러운 역사로만 평가해서인지 이 시기가 우리에 남겨준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관리되는 문화재는 극소수이다.
20세기 전반기 식민지시대에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많은 독립운동 사적지가 산재해 있다. 필자는 2007년부터 2년간 독립기념관의 의뢰로 경기도와 인천의 독립운동 및 6·25전쟁 사적지 실태를 조사한 바 있다. 경기도 화성시만 하더라도 3·1운동 사적지가 100여개 되나, 이미 상당수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3·1운동의 경우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우리가 사는 마을 안의 특정한 집에서 3·1운동이 계획되었고, 또 다른 이웃이 3·1운동을 지도한 인물이 살던 집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표식이 되어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민주화와 산업화, 분단의 역사이다. 이 시기 역사 자원은 문화유산으로 이해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하기에 체계적인 조사와 관리는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6·25전쟁과 관련한 사적지 중 일부는 기념탑도 건립되어 있고 어느 정도 보존되고 있다. 나머지 분단, 산업, 민주화와 관련된 사적지는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 속에 파괴되고 있다. 필자는 1971년 도봉시민아파트에서 1박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아파트 구조가 특이했다. 2층부터 4층까지 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1층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 벽은 매우 두꺼웠고, 남쪽으로 대포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입구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북쪽으로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1층이 군사방어용 벙커라는 것이다. 이 아파트는 1969년 건립되었는데, 2003년 노후아파트 정비 계획에 의해 철거되었다. 다음 세대까지 보존되었더라면 분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 되었을텐데 이렇게 사라졌다. 2007년 문산 역을 출발한 기차가 개성 역까지 달려갔다. 분단으로 중단된 기차 운행이 56년 만에 재개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였으나, 경의선 철로를 복원하면서 DMZ 내의 분단 관련 문화유산이 거의 사라졌음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분단 시대가 남긴 군사 문화유산인 지뢰는 철로 복원 공사의 방해물로만 이해되어 폭파되었고, 100년 전 경의선 개통 당시 깔아놓은 옛 철로는 고철로 사라졌다.
이렇게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깨닫고 전면적인 조사 및 근대문화유산 등록 확대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후세에 우리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