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수 (객원논설위원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착하다'는 말의 용례가 확장되고 있다. '착한 가격', '착한 가게'처럼 물건 값이나 영업 서비스에 대한 관용적 표현을 넘어 일반적인 가치척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본래 '착하다'는 말은 '착한 아이'의 용례에서 보듯, 사람의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의미로 쓰여왔다. 물건 값이 착하다거나 가게가 착하다고 하면 문장론으로는 오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중(言衆)들은 언제부턴가 일상의 일과 사물에 이 형용사를 붙여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약방의 감초처럼 쓰이지 않는 데가 없다. '착한 기술', '착한 결혼', '착한 대출'도 있으며 '착한 몸매'라는 표현이 있는 걸 보면 이 말은 모든 일과 사물의 평가 지표로, 심지어 심미적 기준으로까지 격상된 셈이다.

그런데 '착하다'는 표현은 본래 자신이 직접 다녀온 음식점의 음식 맛과 가격, 서비스가 만족스러울 경우 이를 뭉뚱그려 평가하는 말이었는데,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맛집을 소개하는 글을 통해 확산되어 관용적 표현으로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착하다'는 말의 의미를 확장시킨 전파자들은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맛깔스런 음식을 내놓는 먹거리를 찾는 보통사람들이다. 이들은 명품이나 신상품 구매에 열을 올리는 소비지향적 계층과 구별되는 알뜰파 서민들이다. 이들은 몸소 '착한' 가게를 찾아내서 그 정보를 취향이 비슷한 이웃과 자발적으로 공유하려 한다는 점에서 소박한 소비자 운동가들이라 할만하다.

최근 몇몇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시민들의 취향을 반영하여 '착한 가게'를 지정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 지자체는 '착한 가게'를 '업소 가운데 최저가이면서 평균 가격대비 가격 경쟁력이 있는 업소로 자율적인 가격할인 참여를 통해 서민 생활물가 안정에 이바지하는 업소'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종래의 '모범업소'를 가격 중심으로 재명명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착한'이라는 형용사를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한 제품도 적지 않다. 대기업들도 최근 경쟁적 제품판매 전략보다는 '착한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부는 물론 친환경제품 개발, 공정무역제품 출시 등을 통해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다.

'착함'의 코드에 뒤이어 떠오른 것은 '통큰'이라는 유행어다. 지금은 가격이 파격적으로 저렴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이 말도 본래는 대범한 성격의 사람을 수식하는 형용사에서 파생한 것이다. 그런데 '착함'과 '통큼'의 트렌드를 증식시키고 있는 사회적 토양은 무엇일까? 이 유행어들은 고도 성장기인 70~80년대가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의 불황기에 급속히 전파되었는데, IMF 이후 서민경제가 취약해지고 계층의 양극화 현상, 청년세대의 만성적 실업으로 대표되는 시기다. 어쩌면 '착함'과 '통큼'이라는 어휘가 확산되어 일종의 문화 코드처럼 사용되고 있는 현상은 불황기의 우울한 사회경제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말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정치가들이 '착하고 통큰' 것을 열망하는 시민들의 삶과 그들의 무의식을 읽을 차례다. 그것은 위기 속에서도 알뜰하게 살아가려는 서민들의 생활의지이며, 각박한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이지만 타인을 배려하려는 인간적 온기의 발로이다. 정치행위는 시민들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착한'코드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필요한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아니며, 경직된 이념의 신봉자도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도 아니다. 시민들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줄 아는 배려심, 그리고 갈등을 포용력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이번 보궐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갈망하는 '착하고 통큰' 정치인이 더 많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첨언할 것은 '착한'이라는 평가는 언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될 때 더 위력적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