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날 새벽, 혹여 하고 밖을 내다보니 온통 눈 천지였습니다. 해발 2천750m 천지로 가는 등산로가 완전 폐쇄되었다는 전갈도 함께 왔습니다. '기왕에 왔으니, 그래도 가보자'는 심사로 숙소를 나섰습니다. 칼바람에 날리는 눈보라 속의 백두산은 처음 대하는 저에겐 경외 그 자체였습니다. 내내 깊은 침묵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길고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한 티베트 승려들 틈에 끼어 1시간 남짓 걸어 장백폭포 부근까지 올랐습니다. 고개를 들기조차 어려운 눈보라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뚫고 좀 더 가까이 마주한 백두산은 장엄하다는 표현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작은 글 솜씨로는 다가서기조차 어려운 어떤 성역이었습니다. 한없는 왜소함에 더없이 낮춰야만 했습니다.
L형, 백두가 이럴진대,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는 어떨까요. 제가 히말라야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 초반 수습기자 때입니다.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히말라야 등반 산악인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하나, 둘 모아 두었다가 한데 묶어 기사로 쓰곤 했습니다. 히말라야 14좌를 처음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를 이 시절에 알았고, 그의 책 '검은 고독 흰 고독'을 읽은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생을 잃고 그 뒤 혼자서 낭가파르바트에 오른 매스너는 '(히말라야에서는)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고독은 두려움이 아닌 힘이다'고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느끼고 싶어 했던' 그는 산악인이 아니라 철학자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히말라야는 자비를 잊었는가'라는 기사입니다. 그 해에만 히말라야가 20여명이 넘는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산악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마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죽음의 경계에 있는 히말라야….
L형, 저는 박영석 대장을 두 번 만났습니다. 첫 만남은 젊은이들과 함께 도봉산 입구에서입니다. 그는 그 때도 "도전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라며 "히말라야에서 우리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어 흐뭇하다"고 했습니다. 소탈함 속에 깃든 경건함을 그에게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주말마다 빼놓지 않고 산을 찾게 된 것도, 히말라야 트레킹을 '꿈의 목록(버킷 리스트)'에 넣은 것도 그 때였습니다. 산에는 여럿이 함께 오르더라도, 스스로 걷지 않으면 안되는 인생의 이치가 있습니다. 한없는 감탄이 펼쳐지고, 고독이 주는 즐거움이 동행합니다.
L형,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 박영석 대장을 처음 만났던 도봉산 그 길을 혼자서 올랐습니다. 단풍도 끝 무렵이어서, 여기 저기 쓸쓸함이 배어났습니다. 어느덧 겹겹이 쌓인 낙엽의 푹신한 길을 걸으며 이 시대의 '진정한 산악인'을 떠올렸습니다. 모두 정치판의 블랙홀 현상에 눈이 팔려있지만, 우리는 도전과 탐험정신이 절실한 시대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너무 두려워합니다. 박영석 대장이 세운 히말라야 14좌, 3극점, 7대륙 최고봉 정복이라는 세계 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도 숱한 실패와 도전의 결과 아니겠습니까? 우리사회도 패자부활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의 부재가 노쇠한 사회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이제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강기석 대원을 기리는 합동 영결식이 3일 열린다는 소식입니다. 카트만두에서 '기적의 생환' 뉴스가 꼭 타전될 것만 같은데….
L형, 공자는 논어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자는 오래 산다고 했는데, 왜 히말라야는 48살인 그를 데려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의 땅이어서일까요. 박영석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