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슬 (협성대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시인)
가을 어스름이 내릴 때면 양재시민의 숲으로 나간다. 어제는 석양을 배경으로 노란 은행잎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니 잠시 축복의 순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느 길로 걸을까 생각하자니 불현듯 시 한편이 떠올랐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지요./ 한 사람이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오래도록 서서/ 덤불 속으로 접어든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지요.// 그러다가 다른 길을 택했지요/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덜 다닌 듯했기에/ .....//"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언뜻 보기에 낙엽 덮인 숲길을 걷다가 두 갈래 난 지점에 이르러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대한 평범한 경험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선택이 어려운 것은 선택되지 않은 것이 감당해야 하는 숙명적 배제 때문이다.

필자는 스탠퍼드 대학 인근 팔로 알토에 산 적이 있다. 최근 잡스의 집이 지척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공연히 친한 이웃이나 되는 듯 더욱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그의 연설을 들으면서 필자는 그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독보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아이러니라는 것이다. 이 연설에서 잡스는 '아이러니'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잡스의 삶은 처음부터 아이러니의 삶이었다. 리드대학을 자퇴하고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어 우연히 서체강의를 듣게 되고, 강의를 들으면서 다양한 글씨들의 조합이 이루는 여백의 미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실제적인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던 이 경험은 10년이 흐른 후 첫 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창조적 빛을 발하게 된다.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애플의 역사는 또 어떤가. 20세가 되던 해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된 애플의 역사는 10년 후 잡스 자신이 해고를 당하는 극적 아이러니를 가져왔으나 그는 이 사건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계기로 활용한다.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이루고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를 가져오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최악의 순간에도 결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로 요약되는 듯하다. 그러나 잡스에게 있어서 믿음은 죽음의식과 관계되는 것이다. '매일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분명 옳을 것이다'라는 경구를 잡스는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미 췌장암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을 통해 그는 매일매일을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치열한 삶의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이는 참으로 진실하고 의미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극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삶이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니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잡스의 말처럼 때로 죽음은 삶에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믿음,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아이러니이다. 기대했던 일이 비틀어지거나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 발생하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 인생의 끝에 도달해 되돌아볼 때, 삶의 작은 아이러니들은 인생의 커다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많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인생의 길이란 많은 길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제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개, 세 개의 길을 동시에 가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최악의 좌절을 경험하고도 자신이 선택한 하나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는 사람이 그저 어리석게만 보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평탄한 길이 아니라 거칠고 험난한 길,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끝까지 놓지 않는 그 미련함, 그것이야말로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의 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잡스가 인용하고 있는 '지구백과'의 저자 스튜어트 브랜드의, '항상 배고파하라. 항상 미련하게 살아라'라는 말 뒤에 잡스 자신의 날카로운 직관의 목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