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선물투자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급물살을 타면서 국내 파생상품 투자 시스템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최 회장은 선물옵션 상품에 5천억원을 투자했다가 1천억원 넘게 잃은 것으로 전해졌다. 주로 주식선물 거래에서 큰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선물시장은 위험 헤지(회피) 목적으로 운영되면 순기능이 많다. 그러나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로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개인투자자들이 급증하면서 투기장으로 변질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최근 5년 만에 두 배 이상으로 급성장한 선물시장에서는 하루 만에 투자 원금의 절반까지 잃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데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개인들의 선물거래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급성장하는 선물시장…개미 손실 막대
   국내 선물시장은 1996년 출범 이후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200지수 선물시장 거래대금은 지난해 9천647조원으로 5년 전인 2005년의 4천718조원에 비해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증시 변동성이 커진 지난 8월 거래대금은 1천258조원이다. 월별 거래대금으로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가장 대표적인 선물 상품인 코스피200지수 선물은 1계약 규모가 1억원이 넘는다. 현물시장보다 진입 장벽이 높으나 개인투자자들의 참여가 활발하다.

   지난달 거래대금 기준으로 코스피200지수 선물시장에서 개인이 차지한 비중은 32.3%나 됐다. 기관 비중이 36.7%로 가장 컸으며 외국인은 31%였다.

   개인들은 위험 헤지뿐 아니라 레버리지 효과로 수익을 극대화하려고 선물시장을 찾는다.

   코스피200지수 선물은 15%의 증거금만 내면 거래를 할 수 있어 기본적으로 7배의 레버리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 그 효과는 수십배로 확대된다.

   그러나 레버리지 효과를 노리고 선물시장에 뛰어든 개인들이 큰 손실을 보는 사례도 많다.

   한화증권에 따르면 코스피가 급락한 지난 8∼9월 코스피200지수 선물시장에서 개인들은 1천232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기간 외국인이 8천690억원의 이익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증권 이호상 연구원은 "외국인은 위험회피를 위해 선물 거래를 하지만 개인은 수익을 위해 투자를 한다. 최근 주가 폭락장에서는 잘못된 시세 판단까지 겹쳐 개인이 상대적으로 큰 손실을 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선물 거래에 위험 분산 목적이 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선물 시장에서의 손익 규모만으로 투자 성패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덧붙였다.

   ◇ 위험회피 순기능 실종…`투기판'으로 악용
   선물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특정 상품이나 금융자산을 계약상 정해진 가격에 사거나 파는 것을 조건으로 성립되는 거래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현물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농산물, 원유, 귀금속 등 원자재뿐 아니라 주식, 채권, 통화 등 금융자산을 대상으로 하는 선물이 세계적으로 거래되고 있다.

   선물은 애초에 현물의 변동성을 줄이고 위험을 회피(헤지) 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계됐다. 현물과 달리 가격이 내려도 이익을 내고 올라도 손해를 보는 것이 가능해 방향성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은 증거금으로 많게는 수백 배에 달하는 지렛대 효과를 거둘 수 있어서 투기성 자금이 몰리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현물과 관계없이 선물에만 투자하는 사례가 늘어나 시장 규모가 커졌다.
`압구정동 미꾸라지', `목포 세발낙지' 등으로 알려진 이른바 `슈퍼 개미'들이 선물로 수백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거뒀다는 소문은 개인들의 투기 심리를 더욱 자극했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최태원 SK회장이 선물투자로 1천억원 손실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원금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레버리지를 얼마나 일으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위험성이 크다는 뜻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선물 투자는 극단적일 때 범죄와 연결되기도 한다.

   올해 5월 한 개인 투자자는 주가 폭락을 유발해 이득을 얻으려고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서울역에 사제폭탄을 설치했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그는 선물과 비슷한 금융상품인 옵션을 사놓고, 권리를 행사하는 만기일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총수가 선물투자 '미스터리'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대그룹 총수가 왜 개인적으로 선물 투자를 했을까?

   선물 투자 손실 사실이 세간에 처음 알려진 지난 4월 당시 최 회장이 "개인적인 일"라며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아 여러 소문이 나돌았다.

   증권업계는 최 회장 개인의 차입금이 과도한 수준으로 늘어나자 선물·옵션 시장에서 투기 거래로 목돈을 마련하려다 막대한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한다.

   최 회장은 선친인 최종현 회장의 갑작스런 사망에 따른 상속세 때문에 차입을 많이 한 데다 `소버린 사태' 때 경영권 방어를 위해 추가로 차입하는 등 개인부채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그동안 보유 지분 매각과 주식담보대출 등을 통해 차입금 상환용으로 추정되는 자금을 마련해왔다.

   최 회장은 지난 9월 30일 계열사인 SK C&C[034730] 주식 200만주를 2천900억원에 매각했다. 지난 6~8월에는 SK C&C 주식을 담보로 증권사에서 거액의 주식담보대출을 받았다.

   8월17일에는 SK C&C 보통주 66만주를 담보로 한국투자증권에서 돈을 빌렸다. 6월24일에도 주식 45만주를 맡기고 같은 증권사에서 대출을 받았다. 당시 두 차례에 걸쳐 대출받은 금액은 최대 830억원으로 추산됐다.

   지난해 9월14일에도 최 회장은 SK C&C 보통주 401만696주를 담보로 우리투자증권에서 돈을 빌린 적이 있다. 당시 대출 규모는 2천억원 남짓으로 추정됐다.

   증권사 한 파생상품 애널리스트는 "선물시장에서 과도하게 레버리지를 사용하면 하루에만 투자 원금이 반 토막 나는 일은 부지기수다. 고급 정보를 접하는 그룹 총수도 손실을 피하기 어려운 곳이 파생시장이다. 투자 경험이 부족한 개인은 절대주의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