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찬범 (화성시문화재단 이사)
조선 정조대왕의 초장지라고 전해지던 장소-융릉 남단 경계 철책 부근-가 발굴중이다. 문화재청 주관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담당하며, 기간은 10월 24일부터 시작해서 50일간 진행할 예정이다. 서기 1800년 세상을 떠난 정조대왕의 첫 왕릉은 현 위치가 아니었다. 지금의 건릉은 1821년 비 효의왕후의 사망을 계기로 이장한 곳이다. 초장지가 세간에 인식되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 일부 역사학자들과 용주사가 현 발굴지를 초장지로 지목하며 사적 지정을 요구하면서부터였다. 명분은 문화재 보호였지만 속내는 화성태안3지구 택지개발을 무산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장지임을 입증할 과학적인 자료는 전무했다. 그저 '효심이 애틋한 정조가 아버지 무덤 아래에서 시묘살이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위해서 융릉 남단으로 장지를 정했다' 등과 같은 구전을 근거로 위치를 유추했던 것이다. 정부는 당연히 사적 지정을 거부했다. 그러자 그들은 문화재청을 상대로 감사원 감사청구까지 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초장지가 전격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발굴이 개시되고 2주가 지날쯤 애당초 현 위치를 초장지로 지목했던 L교수는 "확실한 곡장(曲墻·왕릉 주위로 쌓은 나지막한 담)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정조대왕 초장지가 틀림없다. 11월말쯤 현장 공개와 함께 기자회견을 한후 동절기이기 때문에 잠정 중단하고, 2012년 이후에 속개하겠다"는 발굴 현황과 추후 계획을 토로했다. 그렇다면 연장을 논하기 전에 발굴 속도에 박차를 가해 곡장 주변에 밀집·매립되어 있을 유구를 좀더 많이 발굴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기간이 연장되면 융·건릉 경내에 위치한 현장이 흉물스럽게 방치한 것도 볼썽사납지만, 문제는 현 발굴지의 위치와 지형이 역사 기록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조속한 시일내에 명백한 성과물을 공개하지 않고는 신뢰를 얻기가 힘든 형편인 것이다.

실제 역사문헌-정조대왕 비문, 정조대왕 천릉비문, 효의왕후 천릉표석 뒷면, 효의왕후의 천릉지문, '건릉산릉도감의궤', 정조대왕 시책문, '능원침내금양전도'-들을 살펴봐도, 초장지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한결같이 '현륭원 동쪽 2번째 산줄기에서 장사를 지냈다'(葬于華城顯隆園東第二岡)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발굴은 융릉 1번째 산줄기 남쪽 끝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왕릉은 전이 공간과 능침 공간을 산릉(산과 언덕)처럼 경사지고 고도차가 있게 조성했다. 그리고 이장을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했다. 특히 정조대왕 초장지 능은 높고 경사도가 심했던 것으로 기록됐다.('순조실록' 순조 4년 6월 29일 / 健陵陵上形體, 亦如是高峻) 하지만 현재 발굴하고 있는 곳은 완만한 지형이다. 사람이 노력하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하지만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해가 남쪽에서 뜨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현재 진행중인 발굴이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식의 발굴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낳게 하고 있는 것이다. 모쪼록 예정된 발굴기간 안에 초장지의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