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만난 유명 제약회사 사장으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지난 여름, 수도권 책임자들 회식 자리에서 '6월이 되면 맨 처음 생각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단다. 당연히 6·25 전쟁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40대가 태반인 팀장들의 답은 '6·10 항쟁'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아쉬운 대로 공감이 되더라고 했다. 그런데 30대 후반 팀장들의 대답을 듣고서는 '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더라는 것이다. '붉은 악마의 월드컵 길거리 응원'.
세대간 감성의 차이가 이처럼 크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광장의 축제는 하늘과 땅이다. 우리사회가 준비에 게을렀을 뿐, 세대 갈등은 이미 예고되어온 터다. '20~30대의 반항'이니, '40대의 반란'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어찌 보면 붉은 악마 옷을 입고 광장으로 뛰쳐나왔을 때부터 갈등의 골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동네 골목에서 뛰놀던 그 당시 40·50대에게 광장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러나 애써 예쁘게만 보고, 기성의 가치를 거기에 이식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 '세상 물정' 모르는 것으로 치부했던, 열린 공간의 젊은이들이 10·26 서울시장 보선에서 목청을 높인 것이다. 동력을 잃은 기존 정치를 향해 자신들의 의지와 분노를 표로 분출한 것이다. 20~40대와 50·60대는 소통의 방식부터 극명하게 나뉜다. 50대는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다. 구시대의 막내쯤 된다. 40대는 '최초의 디지털 세대'로 신세대의 맏형 격이다.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스마트 폰에도 익숙하다. 종이 신문보다는 21세기 광장인 소셜네트워킹 서비스(SNS)에 친숙하다. 여론의 흐름이나 정보도 인터넷으로 파악한다. 20·30대는 아예 인터넷 속에서 생활한다. 전문조사 기관에 따르면 50·60대는 한 주 동안 하루나 이틀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애초에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 예전 외할머니와 며느리 정도가 아니다.
우리사회는 지금 모두 불안의 늪 속에 빠져 있다. 20대는 취업, 30대는 육아, 40대는 내 집, 50대는 노후, 60·70대는 건강이다. 20~40대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부잣집 아들은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 사장이 되는데, 가난한 집 아들은 그 가난을 대물림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사람은 나이 들면서 세상 보는 눈이 관대해진다. 능력과 분수에 따라 사는 게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만 쳐다보지 말고 괜찮은 중소기업도 지천이니, 그 곳에 가서 일하라고 윽박지른다. 바탕이 이럴진대, 골은 깊어갈 수밖에 없다.
한 시대가 가고, 한 시대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의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이다. 조병화 시인의 얘기처럼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에게 의자를 양보하면 쉽다. 그러나 평생을 맞대고 사는 부부의 갈등도 머리가 희끗 희끗해져서야 결판이 난다.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맡기는 것도 고부간에 힘의 균형이 깨질 때라야 가능하다. 공력의 기간을 쏟지 않으면 정면충돌의 불행이 불가피하다. 세대의 간극은 더하다. 이제 그 세대갈등이 집 담장을 넘어 사회 한복판으로 뛰쳐나왔다. 서울시장 보선이 전초전이 아닐까 싶다. 지난 세월 힘겹게 일궈온 사람들과, 앞으로 열심히 살아갈 사람들이 각기 피부로 느끼는 세상의 온도차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지 숱한 체험을 통해 안다. 부드러운 위로와 따뜻한 공감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꿰뚫어본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에 터득한 경험칙이 젊은 세대를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50대 이상에게는 젊은 날의 소중한 교훈이지만, 신세대에게는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다름,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로부터 존중받고 싶어하는 그들이다. 좀 더 세상을 아는 세대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세대 공존의 출발점이라고 나는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