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슬 (협성대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시인)
겨울은 잔혹의 계절이기도 하고 축복의 계절이기도 하다. 2011년 겨울은 내게는 축복의 계절인 것 같다. 엘리엇은 "한겨울의 봄은 독자적인 계절이다/ 해거름에 축축하지만 영원하고,/ 극지와 열대 사이 시간 속에 정지된 계절이다"라고 했다. 한겨울의 봄은 실제의 계절이어서 해질 무렵이면 축축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로 인해 그 자체가 독자적인 계절이 되며, 마치 이 세상의 계절 같지 않은 영원한 계절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게 이 겨울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뻔했던 과거를 고스란히 되돌려 놓았기에 이를 통해 과거의 '나'를 확인하게 되고, 그 순간 시간은 '정지'되어 마치 영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거의 40년을 만나지 못했던 소중한 친구를 최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사실은 그냥 친구 정도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연애하듯 늘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하얀 얼굴에 선한 눈을 가진 그 친구는 어느 날 홀연히 외국으로 가버렸고 그 이후로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들은 망각의 강 속으로 서서히 흘러들어가 버렸던 것 같다. 예기치 않았던 해후의 충격은 필자로 하여금 기억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후 두어 차례 더 만나는 동안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의 편린들이 서서히 의식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오히려 상대가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대화는 마치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수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변화란 삶의 필연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변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우리 내면에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과거를 환기시켜주는 아주 작은 실마리만 주어져도 우리는 곧바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고, 동시에 과거의 특정한 경험의 의미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내가 즐겨 불렀다던 맷먼로의 워커웨이(Walk Away)나 낫킹콜의 투영(Too Young) 등 주로 노래로 나를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국에서 이 노래의 전주만 들어도 그리움에 가슴이 저려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나는 커다란 눈에 유난히 섬세하고 다감했던 그 친구를 주로 사소한 몸짓이나 표정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각자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환기된 기억은 당시의 경험을 너무나 세밀하고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기억의 방은 마치 그 가운데 자신만의 고유한 날짜와 인상을 적어두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서서히 기억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재동 모퉁이를 돌아 가회동 길로 접어들면 백송의 기품이 서린 학교가 나타난다. 다시 교문을 돌아 나와 안국동 길로 들어서면 '박리다매'를 외치던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나타나고 그 길을 죽 따라가면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입시학원이 떡 버티고 있다. 일순 아이스크림 가게는 베레모에 흰 깃을 세운 여학생들의 깔깔거림으로 하얗게 빛난다. 그러고 보니 과거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은 그만의 고유한 경험의 질과 감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때도 오늘처럼 낙엽이 뒹굴고 있었다. 기억 밖으로 빠져나온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서로 환기시켜 주고 그것을 확인하면서 참으로 행복해했다. 잠시 우리는 과거를 살았던 것이다.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느를 홍차에 찍어먹으며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듯이. 우리는 경험은 했으되 그 당시에는 그 경험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경험은 회상을 통해서만 의미가 완성되기 때문일까? '네 개의 사중주'에서 엘리엇이 말하고자 한 바도 이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했으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의미에 접근함으로써 그 경험은/ 우리가 행복에 부여하는 어떤 의미 이상의/ 다른 형태로 되살아난다."

바람 불어와 신산한 이 겨울, 기억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황량한 현재적 삶 가운데에서도 신생 같은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한 축복의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잊을 수 없는 가슴 벅찬 충격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2011년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 복잡한 마음으로 황망히 끝내는 올 한해도 훗날 또 다른 형태의 의미있고 행복했던 시간으로 회상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