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훈 (시인)
성북동 하면 흔히 그 유명한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를 떠올리거나 혹은 작은 성처럼 담을 쌓은, 잘사는 집들의 향연을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좌우의 음식점을 따라 등뼈처럼 뻗은 다소 좁은 이차선의 길은 쓸쓸한 마을버스 종점 끝에 가 닿고, 거기 왼편에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허름한 돌계단을 따라 터벅터벅 오르면 만해 한용운이 머물렀던 '심우장'이 있다. 바로 그 심우장 뒷길엔 아직도 작은 텃밭이 있고 나팔꽃, 애기똥풀, 냉이꽃 같은 들꽃들이 계절을 따라 소리없이 피었다 진다. 낮은 담과 녹슨 철문들, 나이 드신 할머니가 침침한 눈으로 앉아 졸며 지키는 구멍가게, 좁고 굽은 골목길들이 옛날 내 어린 시절을 누볐던 그 기억의 실핏줄처럼 마치 거짓말처럼 그렇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낡고 오래된 골목이 산성 길과 마주하기 직전, 쓰러져 가는 초록 대문의 단층집 '마가렛의 집'이 있었다.

어린 남매를 두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소처럼 순한 눈망울을 끔벅이던 8살 누리, 노점에서 토스트를 파는 아버지의 초롱초롱한 희망인 초등학교 3학년 은지, 7살 승희 자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면서 꿋꿋함을 잃지 않았던 중학교 1학년 노을이. 떠난 엄마를 그리워하면서도 아버지 할머니와 다정히 살아가던, 분꽃 씨앗처럼 머리와 눈동자가 까맣던 민경이. 그리고 대다수가 비정규직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두고 있던 여러 아이들… 광식이, 미정이, 혁진이… 그들은 그들을 돌봐줄 부모님들이 없거나 일을 나간 시간에 이곳 마가렛의 집에서 그들이 삼촌, 이모라고 부르는 선생님들의 무릎에 앉아 권정생의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를 읽었다. 그들 키보다 한참 낮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서 연필심에 침을 묻혀 가며 삐뚤빼뚤 글씨로 멀리 떠난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으며, 하루하루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글로 썼다. 또한, 마가렛 집의 대모(大母)이신 오수녀님이 빠듯하게 부쳐주신 김치전이나 부추전을 그 책상에 빙 둘러앉아 방싯방싯 웃으며 넉넉하게 나눠 먹었다. 그리고 그때 그 곳엔 내가 사랑하던 여자가 수정처럼 은은히 빛나는 눈을 하고 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동화를 읽어 주었다. 아이들이 '수정 이모'라고 불렀던 그녀의 눈에 붙들려 나 역시 그 곳에 있었다.

주로 나는 그 마가렛의 아이들과 그 골목 끄트머리에 있던 공터나 산성 길 가기 전의 작은 공원-지금은 멋없는 아스팔트 길이 뚫려 사라졌지만-에서 온몸에 흙을 묻히며 볼을 차기도 했고,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숨바꼭질과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 놀았다. 그런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웃통을 벗어젖히고 한바탕 규칙없는 축구경기를 펼치고 나면… 해가 서서히 지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을이 말없이 마을로 번지며 내려왔었다. 산길에 서 있는 나무 그늘에 앉아 나에게도… 그리고 이 가냘프고 작은 동네에게도… 평등하게 물드는 노을 한 자락을 가슴에 담고 저벅저벅 내려오곤 했었다.

사실 무언가를 꾸미거나 수식할 필요도 없던 그 때, 높은 곳에 있었지만…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성북동 심우장 골목! 해거름까지 벚꽃나무 아래 앉아 사랑하던 사람을 기다리던 곳, 기다리다보면 그 작은 골목길을 따라 눈꽃처럼 내리는 벚꽃잎을 다 맞으며 나에게 오던 곳, 일터에서 돌아온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부르던 곳, 행여 늦게까지 어른들이 안 오시면 수녀님이 아이들 불러다 저녁을 먹이고 또박또박 공부를 가르쳐 주던 곳, 바람따라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의 살냄새가 다 맡아지던 곳, 가난하지만 그 가난에 지지 않는 아이들과 수녀님의 공동체가 들꽃처럼 피어나던 곳.

잎이 쓸쓸하게 다 지고 말없는 눈들이 밥풀처럼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내리는 날에 다시 그 영혼의 길을 느릿느릿 걸어볼 참이다.

그때 그 아이들은 커서 없을지 모르지만 그 아이들의 동생들이 눈 내리는 공터에 올망졸망 모여 입김을 불어가며 눈사람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서로의 눈을 바라다 보며 눈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낯선 사내가 되어 버린 나 역시 한 뭉치 눈을 뭉치고 그 아름다운 싸움에 끼어들 것이다. 아이들의 눈에 집중 포화를 당해 한 사람의 눈사람으로 그 공터 한 켠에 서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그 길은 말할 것이다.

'참 잘 왔다. 참 잘 왔다. 참 보고팠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