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계석 (한국예술비평가협회장 음악평론가)
유럽 문화에서 부러운 것 중의 하나가 관객 기반이 아닐까 싶다. 정장 차림의 원숙한 관객들이란 연주가에겐 최상의 선물일 것이다. 좋은 관객이 좋은 극장을 만들고 고스란히 그 감동을 되돌려 받는다. 거꾸로 관람에 익숙하지 않은 불편한 관객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

때문에 오페라, 콘서트, 연극, 미술관에 안목있는 청중과 콜렉터들이 얼마나 있는가가 도시의 문화 성숙도를 말해주는 증표다.

필자는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80년대부터 해설음악회란 것을 수백 회나 진행해왔는데 지금은 상당한 인프라 확충과 관객 기반의 증가를 몸으로 느낀다. 돌이켜 보면 70~80년대는 르네상스, 필하모니 같은 감상실 문화가, 80년대는 오디오 및 음반 회사의 레코드 및 영상감상회가 주종을 이뤘다.

그러다 번스타인 해설음악회를 본뜬 '금난새 해설음악회'가 나오면서 대중화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90년 들어 대학의 사회교육원과 지자체 구민회관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2000년 들어서 예술의전당을 출발한 '11시 콘서트'는 공연의 패러다임을 바꿔 아침 시간대에 주부들과 소통하며 전국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다.

직업상 수천 회의 공연을 경험한 평론가 입장에서 지역에 따라 관객 편차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즈음은 학부모들이 문화를 좇아 주거를 이동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한다. 문화가 도시 경쟁력과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청중이 없어 좋은 공연물을 소화할 수 없다면 공연 기획사들이 회피하기 때문에 그 격차가 날로 심해진다. 정부도 이런 심각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란 것을 운영해 제작비 절감, 네트워크 교류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관객들처럼 발레리나 이름을 축구 선수 이름 외듯 한다든가, 연주회에서 무조건 큰소리로 앙코르를 외치지 않는 성숙한 문화를 만들어 가려면 비평가도 필요하겠지만 행정의 장인 시장(市長)의 마인드가 대단히 중요하다.

모차르트 시대의 귀족들은 모차르트가 작곡하고 연주한 곡에 대해 바로 즉석에서 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재 모차르트도 귀족들의 입맛을 맞추며 예술성을 유지하는 줄타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다.

이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서야 한다. 예산권을 쥐고 있는 공무원과 일품 요리사를 뽑는 '공모'가 과거처럼 요식 행위로 '임무 끝'이라 생각하면 시대착오다. 방송의 '나가수'처럼 활짝 여는 방식을 취하거나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제대로 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세계 최고의 악단인 베를린 필의 지휘자를 단원들이 뽑는 것은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독점적 카리스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호 존중과 호흡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민주적인 절차를 채택한 것이다. 극장장, 지휘자 어느 쪽이든 인맥, 학맥, 향토색에 얽혀 형식적인 들러리 인사를 한다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가고 결국에는 '트위트의 화살'이 인사권자인 시장을 향하게 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마치 종교시대의 도시 건물들이 사원의 높이를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한 것처럼 오늘날엔 시장의 눈높이가 법과 같은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법인화 이후 바람 잘 날 없었던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해 전국 지자체의 여러 극장과 단체에서 장을 뽑는다는 공고가 나부낀다. 삼삼오오 커피를 마시며 부임한 예술감독의 예술성에 대해 담론하는 유럽의 행복한 관객들의 모습을 우리는 언제쯤 닮을 수 있을까.

지금 트위트에 정명훈 지휘자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글쓴이의 주장대로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정 지휘자를 영입한 것이 토목공사 식 발상이었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으나 토론은 소비자의 안목을 터주는 학습 효과가 있을 것이다.

청중 수준을 끌어올리는 최고의 방법은 참 능력의 리더를 뽑는 것. 그 절차와 낙점은 인사권자인 시장의 몫이다. 청중이 감동하면 박수와 앙코르가, 잘못하면 야유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