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다르다. 산과 계곡과 물길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놓은 땅 위에 지어지는 우리의 마을은 이미 공간적이며 입체적이다. 랜드마크는 인공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산세와 물길이 이루는 풍경이었고, 그 속에 자리하는 집이 땅과 밀착되지 않으면 오히려 죄스러운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잠시 기대어 살 뿐이며, 집의 수명이 다하면 주된 재료인 흙과 나무는 그대로 다시 땅으로 귀속되어 자연과 합일되는 이치였으니, 자연을 깔고 뭉개며 세우는 서양의 집과는 그 근본이 다른 것이다.
터무니라는 말이 있다. '터-무늬'에서 파생된 이 말은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 터무니없다는 것이 근거없다는 말이고 보면,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몽땅 지우고 백지 위에 다시 짓는 재개발 같은 사업은 터무니없는 사업이요, 그 결과로 얻어져 판에 박은 아파트에 사는 삶은 터무니없는 삶 아닐까. 그래서 도시의 유목민 된 우리의 삶은 떠돈다.
이 터무니를 한자말로 지문(地紋)이라고 고치고, 자연의 무늬 위에 삶의 기록이 덧대어지므로 문양 문(紋)을 글월 문(文)으로 바꾼 게 지문(地文)이다. 땅은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자연이 그 생성과 변화를 기록하였고 더러는 인간이 그 굴곡된 삶을 통하여 사건과 변천을 기록한 역사다. 그래서 땅마다 다 다르며 그 내용도 마치 인간의 손금과 지문처럼 모두 다르다.
땅을 지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건축의 모든 단서는 결국 땅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새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그 땅을 보지 않고서는 어떤 이미지도 그릴 수 없다. 땅을 가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인 나는 땅을 처음 대하는 순간이 항상 벅차다. 어떤 곳은 이제껏 쌓여진 내밀한 기록을 한꺼번에 풀어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땅은 좀체 그 비밀을 들려주지 않는다. 요행히 땅이 지닌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 그 이야기의 결에 맞추어 지금 필요한 희망적 삶을 덧대어 그리면, 설계가 물 흐르듯 끝나게 된다. 장소가 원하는 내용을 경청하고 그를 시각화하는 일, 이게 건축설계요 도시설계여야 한다.
급기야 서양이 땅의 생리에 눈을 돌렸다. 우리가 서양화가 근대화인줄 착각하고 서양의 미학을 추종하고 있는 사이, 그 미학의 한계에 봉착한 그들은 도시와 건축의 윤리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분열된 공동체의 문제를 심각히 겪은 그들이 이제 그 극복을 위해 거주의 방식을 다시 성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거주한다는 것은 개인과 세상과의 평화로운 조화"라고 했으며, "거주함을 통해 우리는 존재하며, 그 거주는 건축함으로써 장소에 새기는 일"이라고 했다. 장소에 새긴다고 하는 것, 바로 새로운 터무니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 구태한 서양미학의 미망에서 이제라도 벗어나, 새 역사를 창조한다며 터무니를 깡그리 지워 우리를 떠돌게 한 비뚤어진 방식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한다. 금수강산 속에 덧대어 온 아름다운 우리의 터무니를 지키는 일은 우리를 존재시키고 지속하게 하는 방식이며, 우리 삶의 존엄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올 한 해의 칼럼을 마치며 하이데거가 인용한 휠더린의 시구를 덧붙이고 싶다. 마치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옛 풍경 같아서이다. '시적(詩的)으로, 인간은 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