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갖춰져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있었다.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영조 대에 간행된 관찬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를 기준으로 하자면 한양에서 전국 각지에 이르는 도로는 크게 9개로 구분되는데 이 모든 길은 반드시 경기도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길을 꼽자면 한양과 충청, 호남, 영남의 삼남지방을 모두 잇는 '삼남대로'를 들 수 있다.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지금의 과천, 수원, 화성, 오산, 평택과 천안, 삼례를 거쳐 통영으로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평택에서 갈라져 충청도로 가거나 삼례에서 갈라져 해남과 제주까지 닿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길은 한양에서 남부 지방을 가장 유기적으로 잇는 도로라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 철도와 차량을 위한 길이 생기기 전까지 이 길을 오고간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명멸했다. 여말선초의 정치가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를 가면서 정치개혁의 의지를 다졌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고 정조대의 실학자 정약용이 개혁의 좌절을 곱씹으며 강진으로 유배를 갔던 길도 바로 이 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순신이 전라좌도에 부임하면서 달렸을 길도 이 길이었고 앞서 말한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던 길도 이 길이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길도 이 길이었고 전국의 장돌뱅이들이 장시를 찾아 걷던 길도 이 길이었다.
이처럼 길이란 단지 마을과 마을, 지점과 지점을 잇는 단순한 '선(線)'이 아니라 역사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한국의 가옥은 길을 향해 열려 있었고 사립문이나 담장의 높이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길은 곧 생활의 공간이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였다. 사람들은 길을 통해 소통했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산업화 이후 길은 물자 수송의 효율성에 따라 개편되었다. 좁고 꼬불꼬불한 옛길은 넓고 곧게 뻗은 대로로 변했다. 그리고 그 도로들을 통해 우리는 지금의 물질적 풍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달성한 지금 우리는 다시 길의 의미를 되새겨 볼 여유를 얻었다. 물자의 효율적인 운송에 더하여 문화와 이야기가 쌓이는 관점에서도 길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요 몇 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걷기 열풍은 길의 그러한 기능에 대한 사람들의 희구가 반영된 결과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효율과 속도가 가장 중요한 이 시대에, 너도나도 휴일만 되면 느릿느릿 길을 걸으려고 각지의 걷기 좋은 길로 몰려가는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제 길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때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길이라고 하면 자동차와 철도가 오고가는 삭막한 풍경만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길의 본래 목적은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문화가 오가고 이야기가 쌓이는 것에 있다. 최근에 경기도는 경기도 내의 옛길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옛길을 찾으려는 경기도의 사업은 길의 본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첫단추라고 평가할만하다. 여기서 말하는 옛길이란 수원 화성이나 융·건릉, 궐리사 등의 역사유산을 지나는 길이기도 하고 앞서 말한 지지대고개의 사례처럼 지금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길이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가 지나다니는 바로 그 길이 역사와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바로 그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