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원영 (인하대 겸임교수·극단 십년후 대표)
리더십을 받치는 두 개의 기둥은 '권력'과 '권위'입니다. 권력이 강제력을 동반하는 힘이라면, 권위는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권위는 리더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기꺼이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리더십을 '사람의 마음을 여는 과정'이라고 보면, 권력보다는 권위를 갖추기가 더 어렵습니다. 권위는 곧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과 혼란은 권력지향적인 리더들로 인해 파생된 것입니다. 권력만을 추구하면 권력 획득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어 전체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권위는 상대에 대한 지극하고 진실한 '사랑'으로부터 형성됩니다. 사랑은 시·공간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발현됩니다.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보듬어 안아주기도 합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은 상대를 더 성장시키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권위를 갖춘 존경할 만한 리더의 등장이 절실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아픔'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배려하고 격려하게 됩니다. 그 결과, 상대는 아픔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배려와 격려는 바로 '친절'과 '칭찬'이란 형태로 용기와 희망을 선사합니다.

사실 친절과 칭찬은 같은 말입니다. 다만 표현하는 시점만 다릅니다. 상대가 일하는 '과정'에서 표현하는 것이 친절이라면, 칭찬은 일을 모두 마쳤을 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운 행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1930년대 독일에 살던 유대인 선교사의 사례입니다. 그는 아침이면 산책하며,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유독 밀러라는 청년만은 인사를 받아도 무뚝뚝하게 지나치곤 했습니다. 그래도 선교사는 늘 인사를 했습니다.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모든 유대인들이 수감되었습니다. 선교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수용소 운동장에 모두 한 줄로 세우고, 유대인들을 왼쪽과 오른쪽 두 곳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왼쪽 사람들은 전쟁터로 보낼 총알받이들이었고, 오른쪽에는 귀가조치를 할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섰던 셈입니다. 드디어 선교사 차례가 되었을 때 왼쪽과 오른쪽을 결정하는 사람이 밀러란 청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선교사는 그저 반갑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밀러씨!"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밀러의 손가락은 어느 쪽을 가리켰을까요? 오른쪽이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에는 '성적 욕구'와 '위대해지고 싶은 욕망'이라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합니다. 칭찬은 바로 상대의 위대해지고 싶은 욕망을 자극해 더 열심히 살게 하는 힘을 줍니다. 이렇게 중요한 칭찬에 우리가 인색한 이유는 칭찬과 아부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표현되는 것은 같을지라도 사실 칭찬과 아부는 내면에서의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아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행위이지만, 칭찬은 상대에게 용기를 주어 그를 성장시키는 행위입니다.

어린 성악가가 중년의 유명 지휘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성공을 모두가 예상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사망 후 그녀는 사업가와 재혼했습니다. 몇 년 후 프리마돈나가 되었습니다. 지휘자이던 첫 남편은 늘 그녀의 단점을 지적하고 꾸중했습니다. 결국 성악가의 꿈을 접고 평범한 아내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기업가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어느 날 아침식사를 준비하며 콧노래를 부르던 아내에게 남편이 말합니다. "지금 부른 노래, 당신이 불렀소?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멋진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소. 여보, 노래를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소. 내가 돕겠소." 노래를 시작한 그녀는 결국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했고, 관객들은 기립박수로 새로운 프리마돈나의 출현을 축하해주었습니다.

격동의 시절입니다. 불투명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어른이 사라지고, 곳곳에서 가진 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부정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학교 역시 폭력으로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권력만을 지향하는 세태가 남긴 상처들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친절과 칭찬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비로소 건강한 권위가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주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