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환 / 인천본사 편집경영본부장
요즘 한 종합편성 채널의 연속극 '인수대비'가 인기다. 종편 프로그램의 대부분이 바닥 시청률인데 비하면, 이 드라마는 꾸준히 일정 비율의 시청률을 보인다고 한다. 수양대군의 집권 과정, 그의 며느리인 인수대비의 집요한 권력욕이 시청자들을 끄는 모양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정치 계절인 요즘 시대와 맞물려서 인기를 얻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더 든다.

요사이 전개되는 드라마 인수대비의 핵심은 살생부(殺生簿)다. 수양대군이 자신의 집권을 반대할만한 신하들을 죽이기 위해 작성한 명부다.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던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이조판서 조극관, 좌찬성 이양 등이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이를 주도한 이가 바로 한명회이고, 이 난이 계유정난이다.

인류 역사에서 정치적 위험 인물이나 라이벌을 제거하는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살생부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특정인을 추방하기 위해 실시한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kismos)가 비밀투표를 통해 좀 민주적으로 정적을 추방했다면, 살생부는 미운 털이 박힌 자를 맘대로 정해서 손보는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점에서 더 잔인한 방법으로 통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살생부는 정권을 차지하거나 유지하는데 늘 등장했다. 조선시대만이 아니다. 최근 정권에서도 살생부는 예외없이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시절엔 출처 불명의 '민주당 살생부'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민주당 의원 94명을 특1등 공신에서 역적 중 역적에 이르기까지 7등급으로 나눠 나돌았다. 살생부는 정치권에만 있는 게 아니다. IMF 환란위기 때는 퇴출기업을 지칭하는 '기업 살생부'가, 2002년 한일 월드컵때는 대표선수의 선발을 놓고 '히딩크 살생부'가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 4·11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그 말 많은 '공천 살생부'가 또 등장했다. 그것도 여당인 한나라당에서 먼저 나왔다. 민주통합당에서도 언제 나올지 모른다. 출처가 명확치는 않지만 한나라당의 공천 탈락 살생부에는 인천 4명, 경기도 9명 등 13명의 경인지역 국회의원이 포함됐다고 한다. 명단에 오른 인물의 면면을 보면 나이가 많거나, 3선 이상이 대부분이다. 당사자들은 발끈했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살생부에 떠는 이유는 상당수가 구체적인데다, 예전의 예로 봐서 대체로 맞아떨어졌다는데 있다. 이번에도 맞아떨어질까. 두고 볼 일이다.

'정치계절'만 되면 살생부가 왜 등장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우리의 정치적 후진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시스템이나, 국민여론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 '똥고집의 정치풍토'가 낳은 산물이다. 정치권에선 그만 둘 때 그만둘지 모르는 풍토에서, 오죽했으면 또 살생부가 나왔을까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살생부는 치사하고, 살벌한 방법인 건 분명하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정치풍토가 개선되지 않는 한 '살생부의 정치'는 계속 될 것 같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살생부'는 이걸로 끝일까. '천만에요'. 이것이 당내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이다. 다 바꿔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이 정도로 바꿔서야 바닥 민심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제2의 '공천 살생부'가 예고되는 대목이다.

여야 정치권은 지금 공천혁명을 앞다퉈 얘기한다. 4월 총선은 12월 대선과 맞물려 있어 '죽느냐, 사느냐'의 승부수의 선거다. 그래서 제1당이 되기 위한 공천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공천 탈락 운운은 참 비열한 방법이다. 시스템에 의해서 난장판 국회를 만든 정치인, 막말 정치인, 약삭 빠른 정치인, 비리부패 전력자는 우선 탈락시키고, 여기에 전문성, 당선 가능성, 당 기여도, 의정활동 능력 등을 고려해서 정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살생의 계절'. '정치 말년'에 망신당하지나 않을까 정치 원로들이 걱정이다. 퇴진에도 때가 있는 법이다. 무슨 일이고 죽을 때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때가 됐다 싶으면 멋지게 그만 두고, 후배를 위해 길을 터주는 것도 선배 정치인들이 보여줘야 할 덕목이다. 살생부에 포함돼서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느니 차라리 멋지게 은퇴 선언을 하고, 지역과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영광스런 모습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