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동윤 /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의 전체 사업체 수는 307만 개다. 이 중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99.9%이다. 한편, 한국의 전체 종사자 수는 1천175만 명이다. 이 중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종사자 비중은 87.7%이다. 그래서 중소기업을 한국의 '9988'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EU는 '9966'이다. 사업체 수 비중은 같다. 그러나 종사자 수 비중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EU 종사자의 34%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은 12%에 불과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가장 큰 이유는 중소기업 범위 때문이다. 중소기업 범위는 다소 복잡하다.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은 종사자 수이다. 사업체의 종사자가 299인 미만이면, 이 사업체는 중소기업이다. 한국의 기준이 그렇다. 그러나 EU는 250인 미만이다. EU가 중소기업 범위를 좁게 만들었다. 그래서 산술적으로 EU의 대기업 종사자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9988'과 '9966' 속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역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본격적인 한국 중소기업 탄생은 1960년대부터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난 이후이다. 그러니 중소기업의 역사는 50여년에 불과하다. EU의 중소기업 역사는 적어도 산업혁명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업은 성장한다. 기술개발을 통해 제품의 질을 높인다. 시장을 개척해서 판매를 늘린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고용을 확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업의 성장이다. 즉 처음에는 아주 작은 기업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고용을 확대하면서 점차 소기업, 중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한다. EU도 처음에는 '9988'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역사가 흐르면서 '9966'이 된 것이다. 대기업이 많아졌고, 대기업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종사자 300명 규모의 대기업을 창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대기업은 기업 성장의 성과이다.

EU는 27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업체 비중을 보면, EU 27개국 모두 소상공인이 전체의 90%를 넘는다. 한국은 이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종사자 비중을 보면, 1인당 국민소득별로 기업규모 비중이 다르게 나타난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4만 달러인 국가들의 소상공인 비중이 가장 높다. 한국도 이들 국가와 같은 수준이다. 오히려 2만 달러 이하인 국가들보다 높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미만인 국가들은 대부분 동유럽 국가들이다. 이들 국가는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국가들이다. 소규모 창업이 활발하지 못한 것이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구조도 한몫하고 있다. 국민소득 2만~4만 달러는 소규모 창업이 활발해지면서 소상공인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시장경제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즉 기업 생태계가 가장 활발한 시기로 보면 된다.

그러나 소득수준이 더 높아지면 소상공인 비중은 줄어든다. 그리고 점차 소기업, 중기업, 대기업 비중이 차례로 높아진다.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가 넘는 국가들은 기업규모별로 거의 고른 분포를 보인다. 우리가 EU의 사례를 통해 알아야 할 사실은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대기업 중심의 구조가 정착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문제로 시름을 앓고 있다. 앞으로 경제가 발전할수록 경제구조는 대기업 중심으로 흐를 것이다. EU 사례를 통해 이를 확인했다. 그렇게 되면, 중소기업과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동반성장 문제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한국사회를 괴롭힐 것이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바로 기업의 성장이다. 즉 기업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경제는 산업정책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 수출을 촉진해서 경제성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즐겼다. 기업의 성장은 경제성장의 부산물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산업정책은 더 이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팔 것인가?'를 고민하는 기업정책을 펼쳐야 한다. 판로가 확대되지 않으면 기업의 규모 확대와 기업의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판로가 확대되면, 실업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