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태윤 /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정책연구실 연구위원
작년에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의 글에는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특히 작가가 노년에 쓴 글들은 우리 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노년기 삶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 노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를 깨우쳐준다. 작년 필자는 우리 연구원에서 실시한 '노인의 성생활실태와 정책지원방안 연구'를 위해 어르신들을 심층면접하면서 다시 한번 박완서 소설이 주는 메시지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소설 '친절한 복희씨'의 주인공 여성 노인은 버스차장이 되려고 열아홉에 상경하여 남의 집 식모로 들어간다. 식모로 들어간 집주인 남자는 열아홉의 복희씨를 겁탈하고 복희씨는 졸지에 그의 후처가 된다. 수십년이 지나 이제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남편은 비록 몸은 성치 않을망정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네 약국으로 비아그라를 사러 간다. 시골집을 나올 때 훔쳐 나온 아편을 한평생 은장도처럼 품고 살아온 복희씨의 남편에 대한 마음을 그녀의 남편은 반의 반이라도 알 것인가.

작년 면접대상자로 만난 70세의 여성도 필자에게 한 평생 가슴속에 품고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단아한 그녀의 모습에 아주 평탄한 인생을 보냈으리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여성은 평생 한 번도 만족하지 못한 부부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결혼을 무척 후회했다. 심지어 남편을 경멸적인 언어로 부르는가 하면, 지금이라도 끌리는 사람이 있다면 도망쳐 나와서 그 사람과 살아보고 싶다고도 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한 이유는 실은 단순히 부부관계의 불만족이 아니었다. 면접의 마지막에 가서야 그녀가 밝힌 사실은 그녀 역시 일방적으로 결혼을 원했던 남편의 강압적인 성폭력에 의해 결혼한 또 하나의 '친절한 복희씨'였다는 것이다. 그 여성은 '지금이라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그 때는 그랬다'며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여성에 대한 혼전순결관념이 지배했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는 여성노인을 성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소개한 70세의 여성노인이 지금이라도 끌리는 이성과 함께 살고 싶다고 한다면 세상은 그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편 남성노인의 성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남성노인의 일탈된 성행동은 그저 주책 정도로만 여겨져 윤리적 판단에서 면제되곤 한다.

노인들 역시 성에 대해서 이중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성은 수동적이지만, 남성의 성은 그렇지 않아서 남성노인의 성적 욕구는 곧 건강과 젊음의 바로미터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종종 노인 성교육에도 나타난다. 어떤 여성노인이 말했듯이, 노인 성교육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오라고 할 때 응해야 할아버지 기가 죽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여성노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지금의 노인세대가 젊었던 3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 가정용 홈비디오가 보급되던 시대로 집에서 어렵지 않게 포르노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 노인들은 성에 관한 공식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세대들이다. 앞서 실시한 우리 연구원의 조사에서 공식적인 교육을 통해 성에 관한 지식을 얻은 적이 있다는 노인은 1%에 불과했다. 우리사회에서 노인들은 성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다. 그런데 언론은 일부 노인들의 일탈된 성행동을 보도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정책적 지원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만일 노인들이 성에 관한 올바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평생 남편에 대한 원망과 결혼에 대한 후회를 은장도처럼 품고 살아온 '친절한 복희씨'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 같다. 노인복지에 한 가지를 추가한다면 노인 성교육이라고 제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