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한국 학자 중 필자는 21세기가 동서 융합의 시대임을 강조하면서 동서양의 사유의 차이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했다. 흔히 동양이 인간과 자연, 나와 너,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는 일원론적인 사유를 보인다면, 서양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혁명적 선언이 함의하듯 생각이 존재를 정의한다는 이성중심주의적인 이원론적 사유가 지배적이다. 사상이 감정을 앞서고, 정신이 물질의 우위에 있는, 그리하여 나는 너와 분리되고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게 되는 서양의 이원론적 사유는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수정되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유럽 문명의 붕괴와 인간의 소외, 그리고 인간성의 황폐함을 목도한 일부 유럽의 지성은 그 근본적인 원인이 타자를 지배하고 자연을 착취하려는 이성중심주의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이원론에 있다고 진단하여 나와 너를, 정신과 물질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일원론적 사유만이 인간성을 회복하고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게 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필자가 주목한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 역시 뜻있는 선비들이 무고하게 죽어가고 권력에 대한 맹목적 욕망만이 발흥하는 탁류와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실제로 수많은 사화(士禍)를 경험하면서 그 누구보다 시대의 불행과 무질서를 발견하였고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주희를 스승으로 삼아 주자학을 독자적으로 체계화했던 퇴계는 무엇보다 우주 만물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소통하고 화해하면서 조화로운 통일체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물은 서로 대응하는 두 개의 성질로 이루어져 있으나 양자는 서로 대립적이거나 적의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며 보완적인 것이어서 우주와 자연의 궁극은 이 양자의 조화와 통일에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천인합일을 강조하는 퇴계의 일원론적 우주관은 원론적으로 동양의 기본적인 사유일뿐더러 당시의 무도(無道)한 사회를 반성적으로 바라보면서 그가 자연스럽게 도달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퇴계는 2천여 편의 시를 쓰기도 했는데 퇴계에게 학문을 하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른바 학문소이정심(學文所以正心), 즉 학문을 하고 시를 쓰는 시초도 끝도 모두 '바른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바른 마음이란 타자를 나와 동일시 할 수 있는 일원론적인 자세이다. 퇴계를 동양 사상의 시각에서 뿐 아니라 현대 서구 사상의 문맥 속에 놓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은 동서를 융합과 소통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시의성을 고려한 것이며 이를 통해 한국학의 현대적 의의를 밝혀내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소감을 피력하는 자리에서 필자는 이 심포지엄이 21세기 융합과 통섭의 시대에 동서가 대결하거나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 위한 논의를 전개하는 의미 있는 장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학자들뿐만 아니라 서구의 학자들도 참여하여 서양의 관점에서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동양의 관점에서 서양을 바라보기도 하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는 언급으로 마무리했다. 필자의 발상에 공감을 표하는 발언이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적어도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는 대결보다는 통합에 대한 갈망이 더 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대학 캠퍼스에 줄지어 서 있는 종려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늦겨울 비로 한기가 으슬으슬 스미는 대회장에 따스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