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이어지는 보기 드문 항일 투사 가족의 역사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세계에 유례를 찾을 수 없이 강인한 독립투쟁사가 그 안에 펼쳐진다. 의병장 오인수, 아들 오광선, 손녀 오희영·오희옥으로 이어지는 용인의 레지스탕스(Resistance:침략자에 대한 저항 운동을 칭한다)!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의 항일 저항운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광선(1896~1967) 장군은 만주를 누빈 맹장(猛將)이다. 그의 강렬한 무혼은 독립항쟁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21세의 나이로 고향 용인을 떠날 때 그는 본명인 성묵을 광선(光鮮)으로 바꾼다.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뜻을 이름에 새긴 것이다. 한국독립당 의용군, 대한독립군단 중대장, 광복군 장군으로 활약했으며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대일 지하공작대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귀국 후 건군을 위해 노력하다가 국군에 투신하여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다.
그의 부친 오인수(1867~1935)는 1905년 한일늑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으로 투신한다. 용인, 안성 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나 1907년 일진회장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이 이끈 토벌대에 체포되어 8년의 모진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해 아들 오광선을 만난다. 오광선 장군의 장녀 오희영(1923~70)은 용인이 낳은 여성 광복군이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광복군 제3지대 초모공작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모공작은 일본군 내부나 점령지역에 침투해 방송을 하거나 전단을 배포해 한인청년들을 포섭하고 탈출을 유도하는 선무 공작의 하나이다. 오희영이 초모공작원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첩보활동을 전개하던 때 그녀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오광선의 차녀 오희옥 역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정보 수집과 초모공작에 종사했다. 오광선 장군의 부인 정정산은 '만주의 어머니'로 불렸다. 독립군의 군자금 마련, 연락책, 식량 지원 등에 활약하며 얻은 별명이다. 오광선 장군의 사위, 오희영의 부군 신송식 역시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이자 김구 주석의 경호대장으로 활동한 투사였다. 온 식구가 일념으로 항일 레지스탕스를 전개한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자. 의병장 오인수는 추담 오달제(1609~37)의 후손이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주전론을 펼치며 끝끝내 대몽항쟁을 주장하다 청나라 선양에 끌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삼학사(三學士)의 한 분이다. 오인수 일가와 오달제, 이들은 용인의 10대 성에 포함되어 입지를 굳힌 해주 오씨 가문의 사람들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제 강제병합과 병자호란, 그 좌절의 시대에 한 가문에서 국가의 자존 회복에 목숨을 바친 선조와 후손들이 이토록 여럿 나왔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정신이란 이렇게 계승되는 것이다. 산천은 변하고 사라져도 무형의 정신은 오히려 불멸의 혼으로 살아난다. 그래서 한 사람, 한 가족의 정신으로 소리없이 자리잡고 나아가 지역과 국가의 정체성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리라.
지금 우리 용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절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매일 일하고 잠드는 곳의 지난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면 참다운 애향심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요 미래의 발전도 기약하기 힘들 것이다. 용인에서 수백 년 동안 면면히 내려온 충절의 정신, 국난의 대목 대목마다 민중적 봉기로 불타오른 저항운동, 이 역사를 다시 불러와야 할 것이다. 정신을 계승하지 않으면 혼이 빠진 나라, 혼이 없는 도시가 된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그들을 이제 우리의 마음에 영접하고 고향에 모셔서 함께 새 역사를 써나가자. 오늘도 나는 내 마음과 혼에 각오를 새긴다. 정신이 살아있는 용인, 불멸의 혼과 함께하는 용인을 만들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