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 미국은 '대공황'이란 늪에 빠져있었습니다. 고통과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야 했습니다. 처칠 역시 히틀러가 유럽 대륙을 유린하던 당시, 절망에 빠진 영국 국민을 일으켜 세워야 했습니다.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던 국민에게 루스벨트와 처칠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정적들을 폄하하거나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이 반대하는 정책에 대한 꾸밈없는 설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풀리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국민에게 전했습니다.
처칠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자고 외치면서도, 만약 전쟁에서 패할 경우 받아들여야 할 시련에 관해서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루스벨트 역시 같았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시작된 '난롯가의 담화'라고 불린 라디오 방송에서 취임 직후 단행한 '은행 폐쇄'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국민들이 힘들게 번 돈은 은행에 묶여 있었고, 그 은행들이 문을 닫는다는 현실 앞에서 국민들은 절망하고 분노했습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 앞에서 그는 정부 시책이나 배경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면서, 국민이 정부를 믿고 따라와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국민들이 가졌던 공포와 불안감은 그의 말을 통해 희망으로 전해졌고, 정부와 국민 사이의 신뢰감이 조성되었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남'을 높이는 화법을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용기를 얻었고, 위기를 구할 당사자들이 곧 자신들임을 깨달았습니다.
히틀러는 어땠을까요? 그는 자신을 높이는 말에 몰두했습니다. 교묘한 선동술로 자신을 신격화했습니다. 그의 말을 살피면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분법적 논리를 펴라.' '신비로움을 조성하고 유지하라.' '거짓말도 반복하면 믿는다'. 그는 국민에게 이해를 구하는 대신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했습니다. 여기에 속은 국민들은 99.7%의 지지로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살하고 맙니다.
'남'을 높이는 말을 하는 루스벨트는 미국을 최강국으로 이끌었지만, '나'를 높이는 말을 한 히틀러는 독일을 패전국으로 만들었고 국민을 사악한 민족으로 각인시켰습니다.
선거의 계절입니다. 여야의 수장들은 연일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표현은 달라도 같은 맥락입니다. '상대 진영에게 정권을 맡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 진영을 '타도해야 할 적'으로 바라본 결과입니다. 선거란 정당에서 내놓은 정책이라는 '상품'을 국민들이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상품이 만들어진 배경과 상품의 특성을 알리는 일이 선거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상대의 상품이 '저질이니까 선택하지 말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니 국민은 '저질' 중에서 골라야만 합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다보니 누가 정권을 잡아도 상대는 끊임없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사사건건 비협조로 일관하게 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이런 정치현실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정치지도자들이 결국 이런 현실을 만든 장본인들은 아닐까요?
19세기 말, 영국에는 두 명의 정계 거물이 있었습니다. 한 귀부인이 두 정치지도자를 만난 후 이렇게 평했습니다.
"내가 글래드스톤을 만났을 때는 '그'가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를 만났을 때는 '내'가 영국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글래드스톤은 '똑똑한' 리더입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따듯한' 리더입니다. 지금 이 땅에는 디즈레일리 같은 정치가, 즉 힘들어하는 국민에게 희망과 격려의 말을 통해 국민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정치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