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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찬 / 수원시 한의사회 회장
조선시대의 국왕들 중 특히 한의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았던 정조대왕이 발굴해 낸 명의들이 있다. 고약 제조의 달인 피재길이 그들 중 한 명이다. 피재길(皮載吉)은 당시 중인이던 의원 집안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피홍즙(皮弘楫)은 종기 치료를 잘하는 의원으로, 주로 고약을 잘 배합해 썼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서, 당시 아직 어렸던 재길은 아버지의 의술을 전해 받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가 어깨너머 보고 들은 것으로 여러 가지 처방을 가르쳐 주었다. 재길은 의서를 읽은 바가 없고, 다만 약재를 모아 고약을 만드는 법만 알고 있었다.

종기에 쓰이는 고약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꾸리며 골목골목을 다니니 감히 의원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러나 워낙 종기가 많던 시절에 민간에서는 물론 사대부들도 소문을 듣고 불러다 그의 고약을 써보면 자못 효험이 있었다. 정조 계축(1793)년 여름 임금이 머리에 부스럼을 앓아 좋다는 침과 약을 모두 써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부스럼이 얼굴과 턱 부위까지 번졌다.

한여름인 터라 침소에서 쉬는 것조차 편치 않았다. 모든 내의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했고, 조정 신하들도 날마다 무리를 지어 기거하며 임금의 병환을 논하였는데, 사관 한 명이 재길을 추천하였다. 불러들이라 명하여 재길이 입궐하였다. 천한 재길은 하늘 같은 추상을 보니, 쩔쩔매며 연신 땀만 흘리고 물어보는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그 모습을 본 좌우의 여러 의원들과 신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임금이 가까이 다가와서 진찰하게 하며, "두려워 말고 너의 기량을 다해 보아라" 하니, 재길이 "신에게 감히 주상께 올릴 처방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며 곧 웅담에 여러 약재를 섞어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환부에 붙였다. 임금이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나을 것입니다." 얼마가 지나자 모두 재길이 말한 그대로였다. 임금이 약원에 글을 내려 유시하였다.

"약을 붙이고 조금 뒤에 전날의 통증을 완전히 잊게 되었다. 예상치도 못한 기술과 비방이 있으니, 의원은 명의라 할 만하고 약은 신방(神方)이라 할 만하다. 그의 노고에 보답할 방법을 의논하도록 하라." 약원의 신하들이, 먼저 내의원의 침의에 임명하여 6품의 품계를 하사하고, 정직을 내려 줄 것을 주청하였다.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여, 즉시 나주 감목관을 제수하자 내의원의 의원들이 모두 놀라 탄복하여 자기들보다 낫다고 인정하였다. 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에 알려졌고, '웅담고'는 천금의 처방으로 세상에 전해졌다.

이렇듯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실력이 있다 하면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정조대왕을 만나 민간의 고약장수가 내의원 의원으로 승격되는 인생역전의 기회를 얻은 피재길이었지만, 1800년 여름 다시 발병한 정조대왕의 종기를 치료하지 못해 결국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피재길은 당시 내의원 수의였던 강명길 방외의(方外醫) 심인과 함께 정조대왕 시해의 혐의를 받아 열흘이 넘도록 고문을 당하고,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다. 민간의 고약장수에서 내의원 의원으로, 그리고 다시 역의(逆醫)로 몰려 모진 국문을 당한 후에 3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피재길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보면서, 인생은 눈앞의 일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길게 멀리 보고 늘 겸허하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4·11 총선 출마자들도 예외는 아니리. 낙선자든 당선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