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인배 교수가 지난 8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풍속화로 본 조선시대 죄(罪)와 벌(罰)'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물 고문'은 언제부터 행해졌을까.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속칭 '박종철 군 고문 치사사건'도 물고문이었다. 최근까지도 경찰 등 수사기관의 가혹행위에 물고문은 빠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물 고문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그림에 확연히 드러난다. 무릎을 꿇린 채 양손은 뒤로 묶고 얼굴에 종이를 말아 감고 형 집행인이 입에 담은 물을 뿜는다. 그러면 종이에 물이 먹어 숨을 쉬기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 기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병에 담은 잿물을 코에 붓는다. 물 고문이다.

지난 8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2012년 상반기 다섯 번째 강좌에서는 '풍속화로 본 조선시대 죄(罪)와 벌(罰)'이란 주제가 다뤄졌다. 이날 강좌는 차인배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가 맡았다.

차 교수는 이날 흥미로운 그림들을 연달아 소개했다. 모두 고문(拷問)에 대한 것이었다. 차 교수는 주로 김윤보와 김준근의 풍속화를 예로 들었다. 차 교수는 "물 고문의 경우엔 문헌기록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그림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 가해진 고문은 자백을 쉽게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범죄를 수사하는데 현장범을 제외하고 죄인의 범죄 단서를 찾아내기란 매우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범죄의 증거는 현장의 물증과 목격자의 증언, 범죄자의 자백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엔 이들 증거 가운데 자백(자복)을 가장 중요한 범죄구성의 단서로 여겼다. 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각종 잔인한 방법에 의한 혹형이 가해진 것이다.

차 교수는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고문의 강도가 세지는 측면이 있다"면서 "하지만 영조 때는 혹형이 폐지된 적도 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부활했다"고 설명했다.

고문 만큼 손쉽게 자백을 받아낼 방도가 없었다는 얘기다. 고문은 억울한 '죄인'도 많이 만들어 냈다고 한다. 고문이 무서워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허위자백을 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차 교수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행정편의주의'라고 정의했다. 빨리 사건을 처리하려는 '공안 당국'의 입장만이 반영된 것이란 얘기다.

고문의 종류도 다양했다. 때리는 신장이나 곤장도 있었고, 죄인의 무릎을 꿇려 그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무릎을 짓밟는 압슬형, '주리를 트는' 주뢰형, 발바닥을 달군 인두로 지지는 낙형 등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죄가 밝혀지면 형벌을 내리는데, 조선의 형벌체계는 '오형(五刑)'이 중심이었다. 일종의 신체형으로 회초리로 볼기를 치는 태형, 장독과 같은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많았던 장형, 노역을 시키는 도형, 유배형인 유형, 그리고 바로 목숨을 끊은 사형 등이다. 사형도 목을 매는 교형과 목을 자르는 참형, 독을 마시게 하는 사약형 등으로 나뉘었다.

다음 여섯 번째 강의는 오는 22일 오후 2시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양보경 성신여대 교수가 나와 '한국의 옛 지도'란 주제로 강연한다.

/정진오기자

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경인일보 공동주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