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혁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벌써 사도세자가 돌아가신 지 250년이 되었다. 비운의 왕세자라고 우리들에게 인식되어지고 있는 사도세자! 그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채 250년 동안 우리의 기억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수원, 화성, 오산 사람들에게 사도세자는 매우 귀한 존재이다. 정조가 1789년 7월 15일에 그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옛 수원지역이 대대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옛 수원 지역만이 아니라 현재의 경기남부 지역 전체가 사도세자의 현륭원 이전으로 발전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경기남부 지역의 도시발전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기여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바라보아야 할 때가 왔다.

사실 사도세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정신병에 의한 죽음을 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의 문집에서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남을 해쳤다"는 설이 있다고 하였고 자신은 그 말을 신뢰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처럼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한 희생물이었다. 2007년에 필자가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던 시절 사도세자의 서거 245주년을 맞아 화성행궁 앞에서 진혼제를 지낸 일이 있었다. 당시 이 진혼제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1만여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당시 진혼제는 인간문화재인 김금화 만신이 주도하였는데 3시간이 흐른 뒤 사도세자와 접신이 되었는지 김금화 만신이 절규에 찬 목소리로 '목말라, 목말라!'를 외쳤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사도세자는 1762년 7월 4일에 뒤주에 들어가 물 한 모금, 밥 한 톨도 먹지 못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겠는가! 그런데 '목말라, 배고파'라는 절규를 뒤로 하고 만신의 목소리는 어느덧 평온을 찾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과 같은 비극적 죽음을 만들지 말아 달라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쓰러지면서 진혼제가 막을 내렸다.

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와 같은 죽음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당쟁으로 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쟁이란 것이 결국 서로의 이익을 위해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상대방을 죽이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 어떤 논리를 가져다 대어도 결국 백성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당쟁일 뿐이다. 그리 보자면 오늘날 정치 역시 조선후기 살육의 당쟁과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사도세자는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일을 한 인물일까? 사실 그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세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역적으로 몰려서 죽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에 대한 자료를 대부분 없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유고 문집인 '능허관만고'와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 그리고 아들인 정조가 정리한 그의 전기 '현륭원지' 등을 분석해 보면 그는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외세에 의해 우리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죽어 나가고, 아녀자들이 능욕을 당하고, 이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것에 대해 늘 가슴 아파하였다. 그래서 그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지 않는 자주적인 나라 만들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당시 안정적 입장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들에 의해 사도세자는 분란의 대상자로 지목되었고 결국 제거 대상이 된 것이다. 신하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 비운의 왕세자! 하지만 이제 그의 진정한 국정운영 의도가 밝혀지고 있다.

사도세자 서거 250주년을 맞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사도세자의 원찰인 용주사와 공동으로 6월 1일부터 특별전을 개최한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관련된 국내 첫 번째 전시이기에 귀한 자료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사도세자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가 무엇인지, 현재 그 꿈이 이루어졌는지를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당쟁이 오늘날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였으면 한다. 서로를 죽이는 정치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정치를 하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