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동원 /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최근 실리콘밸리는 다시 벤처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2011년 벤처투자자금이 역대 최대 규모인 291억달러(약 34조원)를 넘어섰고, 또한 신생 벤처기업들의 투자회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금년 4월 SNS의 최강자인 페이스북은 실리콘밸리를 놀라게 하면서 사진 앱 개발회사인 '인스타그램'을 10억달러(약 1조1천500억원)에 사들였다. 인스타그램은 직원 13명에 불과하고 창업한 지 약 2년에 불과한 작은 신생벤처였다. 또한 '애플'과 '구글' 같은 강자들도 신생벤처를 사는데 거리낌이 없다. 애플은 '시리'라는 음성인식 벤처를 2억달러에 인수한 바 있고, 구글은 모바일 광고회사인 '애드몹'을 7억5천만달러에 인수한 것을 포함해서 2010년에만 48개 기업을 인수했다.

미국 대기업은 엄청난 금액을 주고 신생벤처를 인수하곤 한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필요한 기술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기술을 얻는데 서슴없이 투자한다. 대기업은 벤처가 시작한 비즈니스를 완성해서 수익을 올리며, 벤처는 기술을 넘겨주고 투자회수를 한다. 이런 신생기업의 성공을 본 청년들은 저마다 기업가로 성공할 꿈을 가꾼다. 자연스럽게 창업이 늘어나고, 기술이 발전하며, 성공기업이 증가한다. 이처럼 대기업이 벤처캐피털로서 역할을 해주면서 건전한 기술생태계가 완성된 것이다.

국내에서는 대기업이 벤처를 사들이며 신데렐라를 낳는 스토리가 왜 없을까?

그 이유는 절대적 지위를 가진 우리 대기업들은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벤처를 사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갑'의 위치에서 단가를 깎고 기술을 가로채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벤처의 기술 출구는 막혔다고 보아야 한다. 기술 출구가 막힌 벤처는 고전 끝에 도산하게 되고, 이렇게 사라지는 벤처를 보면서 청년들은 꿈을 접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 한국경제의 창업환경이며 기술생태계의 단면이다. 심지어 우량 벤처들도 고사(枯死)하며, 신생창업은 시들해지는 우울한 모습이다.

대기업의 중소벤처기업 인수를 보고, '유망기업을 잡아먹었다'고 표현하는 사회 일각의 부정적 인식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벤처를 인수하는 '벤처판 신데렐라' 사례가 일단 나오기만 하면 해소될 것으로 본다. 물론 여전히 후려치기로 벤처를 인수하게 되면 사회적 인식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벤처기술을 사는 쪽인 대기업의 의식전환이 매우 중요하다. 벤처를 육성하는 것이 결국 대기업에 보상을 줄 것이라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 벤처기업 쪽에서도 정당한 가격을 쳐줄만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 특히 '벤처판 신데렐라'가 되려면 독창적인 사업모델이 될 만한 기술을 갖춰야 한다. 앞서 말한 '인스타그램'만 보아도 페이스북이 꼭 필요한 기술을 보유했다. 페이스북이 10억달러를 지불한 것은 '인스타그램만이 가진' 기술의 가치였다. 그 기술에는 모바일 폰으로 찍은 사진을 바로 편집해서 소셜공간에 공유하는 기술, 라이브 필터, 인스탄트 쉬프트, 원클릭 회전 등이 포함된다. 또한 인스타그램은 경쟁사인 '패스(Path)'가 갖지 못한, 트위터처럼 누구에게나 승인 없이 팔로잉하는 개방형 플랫폼이 있었다. 이렇듯 경쟁사와 차별되는 히든카드가 있었기에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우리 IT대기업들도 벤처기술을 사야하는 상황으로 이미 진입했다. 금년 삼성전자가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업체인 '엠스팟(mSpot)'을 880만달러(약 100억원)로 인수한 것이 한 사례이다. '엠스팟'은 모바일 기기에 음악과 동영상을 전송해주는 클라우드 컴퓨팅 기반 소프트웨어 업체였다. 국내 IT대기업들의 벤처 인수 필요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대기업의 실력을 보완해 줄 기술역량을 갖춘 벤처에 기회가 열린다는 의미이다. 대기업의 인식전환과 혁신기술을 장착한 벤처창업이라는 과제가 아직 남아있지만, 한국 땅에서도 '벤처판 신데렐라'가 탄생할 수 있는 초기 싹이 보이는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