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하면 청암(靑巖)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창업정신을 계승, 확산하기 위해 제정된 청암상 역시 상금이 현재 2억원이라고 한다.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가 실물경제에서 문화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파급되는 현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각종 상들이 오히려 상금을 인상하거나 적어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반갑고도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단기적인 경제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적인 문화 예술의 논리로 풀어나가려는 것에 우리 해법의 독창성이 있다. 필자는 2012년 6월 2일 '호암예술상' 수상자인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이 준비한 렉처 콘서트에 참석한 바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사이먼 래틀로부터 "세계 작곡계를 이끌 차세대 5인 중 한 명"으로 지목받은 당사자는 정작 수상에 대해, 아마 이번 콘서트를 먼저 듣고 수상자 결정을 했으면 수상을 못했을 것이라는 유머 섞인 소감도 잊지 않는다.
아마도 윤이상을 잇는 급진적 모더니즘을 개척한 작곡가라는 평가를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 역시 그날의 현대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연주된 콘서트 곡 중 루이스 캐럴 원작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발췌곡에 주목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젊은 세대라면 어린 시절에 한두 번쯤은 읽었을 법한 책이다.
이 책을 즐겨 읽는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진은숙 작곡가 역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쓰면서 내 개인적 경험으로 오페라를 쓰는 듯한 기이한 경험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을 많이 꾸는 편이었는데, 책을 읽을 때도 내가 꿈속에서 경험했던 것이 책을 통해 다시 반복되는 듯해 굉장히 놀라워하던 것이 기억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판타지 문학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현실이 어둡고 힘들수록 우리는 우리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상의 세계를 추구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잊어버렸던 나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새로운 나를 재정립하기도 한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역시 초현실적인 환상의 세계를 통해 자신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실제로는 책의 2장 '눈물의 웅덩이'에 나오는 '나는 누구인가'로 이 작품의 첫 장면을 시작한 것 역시 이런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보인다.
어느 날 오후 언니와 함께 강둑에 앉아 있던 엘리스는 흰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어 순식간에 몸이 엄청나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이른바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이 경험을 통해 오히려 엘리스는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현실과는 전혀 다른 신비한 세상과의 만남은 무한한 상상력을 촉발한다. 관습적 시선이 아니라 낯선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은 새롭게 보일 것이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의 해법을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문화 예술의 힘이 여기에 있다.
예술은 경제 논리가 요구하듯 단박에 가시적인 효과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곰삭은 우리의 먹거리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우리만의 맛을 만들어나가게 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미래의 한국은 물론 세계를 이끌어나갈 저력이 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기술정보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단지 기술이나 정보가 아니라 그러한 기술과 정보를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이다.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아니 위기에 처할수록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문화 예술을 더욱 육성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익살스러운 음향과 리듬으로 환상의 세계를 독창적으로 재현해낸 진은숙 작곡가는 물론이거니와 탁월한 곡 해석으로 이를 다채롭게 표현해 낸 소프라노 서예리 역시 주목할 만한 아티스트였다. 지금 세계무대를 주도해 나가는 한국 출신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눈부신 활동에서 이상한 나라, 한국의 엘리스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