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희 / 한경대 행정학과 교수
요즈음 버스 정거장에 새로운 풍경이 하나 생겼다.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광역 버스 중에 M 버스는 좌석에 승객이 다 앉게 되면 정거장을 통과한다. 그래서 기다리는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기다리는 순서가 곧 좌석 순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스 정거장 바닥에 번호판이 있고, 모두가 여기를 중심으로 차분하게 줄을 서 있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새치기는 서로가 용납하지 않는다. 이 조그마한 제도 개선 하나가 교통질서를 정립할 뿐만 아니라 시민 의식을 개혁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신뢰사회의 화두는 결국 예측가능성에 있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그래서 졸업하여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열심히 일하면 집도 사고,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믿음이 신뢰사회의 출발이다. 그런데 새치기하는 집단이 많아지면 신뢰사회의 기대를 저버리게 한다. 월급쟁이에게는 꼬박꼬박 세금을 받아 가면서도 재벌의 조세 포탈이나 횡령에 대해서는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의 표준화된 형량이 적용된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 국민들이 잊을 만하면 '국민 경제에 기여한 공을 인정하여' '사면'의 정형화된 행보를 가지게 된다. 일반 서민에게 추상(秋霜)과 같은 공권력이 '그들'의 구조적 비리에 대해서는 솜방망이가 되는 특권 구조가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서민의 좌절감을 증폭시킨다.

그런가 하면 진입 장벽의 벽은 매우 높다. 과거 대학 입시의 수석이나 사법고시의 수석 합격자들이 언론의 초점을 받았다. 가난한 농민의 자녀 또는 생활보호대상자의 자녀가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공부하는 것이기에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흐뭇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공표하지 못한다. 잘사는 사람들의 잔치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경제력 때문에 교육의 기회에 차별이 생기기 시작하면 부의 불평등은 악순환 고리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아예 진입에 대한 희망마저 포기해버리는 '자진탈퇴자'가 양산되기 시작한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해 뛰어다니다가 어느 순간 좌절하여 알아보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국민소득 2만달러의 시기에 더 큰 좌절감이 형성될 우려가 있다. 경제성장기에는 열심히 일해서 대박을 터뜨리는 꿈을 꾸었지만 지금의 서민에게는 가난과 빈곤의 대물림을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을 하게 한다.

실로 우리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있는 불신감과 좌절 의식 그리고 피해 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향후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데 신뢰사회의 회복은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도 있다. 버스 정거장에 기다리는 버스 표지판을 정해두고 순서가 되면 차례대로 타면 된다고 하는 예측가능성을 알려주는 지표 수준의 방향만 있어도 된다. 신뢰사회의 출발이 공정사회에서 시작되는 이유이다. 이를 위해 기회 균등을 제약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육과 관련하여 모든 장애요인을 극복하는 전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영유아 교육에서부터 중도 퇴직자 그리고 연금 수혜자에 이르기까지 자기실현을 위한 생애맞춤형 교육의 기회는 국가적으로 지원이 있어야 한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경제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적 영역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통해 먹거리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아 성취와 사회에 대한 신뢰사회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뢰사회를 위해서는 폐쇄성을 극복하고 투명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무엇인가 있다'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국민적 의혹에 대해 투명하게 밝히고 철저하게 수사하는 사법부의 기강 확립도 필요하다.

물론 신뢰사회는 국가의 몫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상영된 '돈의 맛'이라는 영화가 재미있는 화두를 던져준다. 돈의 맛에 길들여지면 돈의 노예가 되어 인격적 모욕도 모르고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애를 찾아간다는 결말이 자본주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 희망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도 찾아야 한다. 신뢰 사회의 구축을 위해 성숙한 민주 시민 의식이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