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혁명의 성지요, 베이스캠프로 공산당의 심장부였던 모스크바와 제2의 도시라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성자 베드로의 도시'와 '표트르 대제의 도시'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 '문화의 고도(古都)'였다. 2003년 5월 27일로 도시 창건 300주년을 기념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네바강 위에 '성스러운 로고스'로 세워진 화강암 도시이자 인공문화도시였다.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긴 뒤, 1917년 10월에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한 진원지가 되어 새로운 사회주의가 시작된 이곳에 예수님의 흔적이 곳곳에 보존되고 있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칼 막스 말대로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유물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 종주국 심장부에 공산당 지배 70년을 받고도 예수님을 그리는 러시아정교의 흔적이 성당에 그대로 곳곳에 보존돼 있고, 신자들과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참배하고 있었다. 숱한 순교자들을 냈고, 정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성경 등 종교서적을 불태우는 등 철저한 종교탄압이 자행된 역사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피터대제가 러시아를 유럽의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 발틱해를 바라보고 있는 늪지대에 조성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등록될 정도로 많은 역사와 예술적 가치를 담고 있었다. 러시아 발레의 본산인 마린스키극장을 위시해 1년 내내 오페라공연이 끊이지 않는 예술의 도시로 도시전체가 예술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련시대 공산혁명의 비조인 레닌이 죽자 1924년 그의 공적을 기리는 뜻으로 도시 이름을 레닌그라드로 변경했다가 1991년부터 옛 이름을 되찾았다는데, 혁명과 전쟁의 참화속에서도 도시의 건물을 포함한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유럽보다 더 고색 창연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이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푸시킨의 동상이며, '죄와 벌'의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의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서구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난개발로 스카이라인도 뒤죽박죽인 우리 도시들을 떠올리면서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는 무식한 도시행정의 한심함을 새삼 절감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위엄과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여름궁전은 이제 예르미타시 박물관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표트르대제(피터대제)가 파티 장소로 쓰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한다.
대영,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1817년 완성된 바로크양식의 예르미타시 국립박물관은 그 규모와 화려함이 대단했다. 피카소, 고흐, 세잔, 고갱, 미켈란젤로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루브르박물관보다도 진품이 더 많이 진열되어 있다는데, 300만여점을 준비하여 전시한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50만여명이 공사에 동원되고, 공사기간만 40년이 걸린 세계 3대 성당의 하나인 이삭성당은 높이 102m, 지름 1.8m의 대리석 기둥 48개로 세워졌는데, 황금빛 돔은 100㎏ 이상의 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러일전쟁때 대한해협에서 크게 패한 러시아 발틱함대의 군함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내 성피터스버그 니바 강변에 전시되어 있는데, 당시 500여명이 승선하는 거대한 군함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세계 조선산업 1등국이라는 우리지만, 러일전쟁 당시 발틱함대를 건조했던 제정 러시아의 모습과 당시 조선의 고종황제가 아관파천(俄館播遷)하여 지낼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겹쳐져 착잡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국의 왕과 왕세자가 자국의 왕궁에 있지 못하고 타국의 공관에 피신하여 1년여 타국 군대의 보호를 받았으니 약소국의 비참한 처지가 새삼 한탄스러웠다. 친러파 정치가로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러시아공사를 지내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고종의 밀명을 받아 주도했던 이범진은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충격을 받고 이듬해 상트 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자결했다. 망국(亡國)의 한을 순국(殉國)으로 대응한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4대 강국이 새로 판을 짜는 구한말을 연상시키는 소용돌이 치는 한반도정세를 보면서,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은 언젠가 그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소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