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만 해도 런던은 전 세계의 4분의1을 식민지로 지배하던 거대한 제국주의 국가의 수도였다. 1901년 주차영의양국공관 3등 참서관에 임명되어 공사 민영돈과 함께 런던으로 부임했던 이한응은 1904년 민영돈이 귀국하자 공사 서리로서 복잡하고도 중요한 대영외교의 모든 책임을 혼자 맡았다. 그는 서울의 관리들과는 달리 이미 조선의 장래가 위험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고, 이 전쟁의 승리국이 조선을 지배할 것임을 통찰했다. 그는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영국정부에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고 영일동맹의 부당성을 항의했지만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이 없어졌으니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혈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참고 견디리오.… 죽을 뜻을 매듭지으니 다시 할 말이 없노라"유서 행간 행간에서 읽히는 그 비분강개와 통한은 지금도 우리의 심장을 후벼 판다.
전의(全義) 이씨 이한응 가문은 용인 이동면에서 선대부터 세거 성씨 집성촌을 이룬 명문 거족이다. 이한응(李漢應·1874~1905) 열사는 이동면 화산리에서 태어나 5세부터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16세에 관립영어학교에서 공부하고 21세에는 과거에 응시해 성균관 진사에 합격한 인재였다. 전통유학과 신학문을 겸비한 덕망 있는 관리였으나 그 뛰어난 자질을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의 순국은 을사늑약 체결일(1905년 11월 17일) 반년 전의 일이다. 조약 후 자결한 민영환, 조병세, 홍영식 등보다 7~8개월 앞섰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자결한 이준 열사보다 2년 전이다.
우리 용인은 수백 년 동안 충절의 정신이 면면히 내려온 고장이다. 구한말에도 국권이 흔들릴 때부터 광복의 날까지 용인 항일투사들의 강한 정신은 스러질 줄을 몰랐다. 임옥여·이익삼·오인수와 같은 의병장, 이한응·민영환·김석진과 같은 관리, 여준·맹보순·장형 같은 교육자, 오광선·김혁·이홍광 같은 무인(武人), 항일지사 오의선, 언론인 유근, 청년공작대원 오희영과 오희옥, 비밀결사 의열단원 남정각 등 각계각층에서 일제에 항거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1만3천200여명의 민초들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우리의 역사에서 8월은 광복(光復)이라는 빛과 국치(國恥)의 어둠이 공존하는 달이다. 이한응 열사의 순교 5년 후 한일병합(1910.8.29)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35년간 일제의 압제를 이겨내 광복(1945.8.15)을 되찾은 나라! 대한민국은 이제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고 있다. 세계 70억 인구가 지켜보는 지구촌 최대의 축제, 204개국 1만5천명의 선수단이 경쟁한 2012 런던올림픽에서 메달순위 5위를 기록했다. 열사의 원혼이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그러나 지금 동북아는 구한말 시대 못지않은 전환기에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또다시 긴장의 기류가 조성되고 있다. 우리 용인 또한 민선5기의 전환점을 돌며 새롭게 도약하는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시기에 있다.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확보한 지위를 튼튼히 뿌리내리고 용인을 모든 시민이 행복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더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올림픽 축제의 도시가 열사의 순국의 피가 흐른 곳임을 잊지 말자. 큰 뜻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순교자적인 정신이 패권국을 당당히 이길 수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열사가 뿌린 피에 보답하는 길이며, 용인 순국선열들의 불굴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