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코스모스는 나에게 첫사랑의 향기를 알려주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 첫사랑처럼 눈에 아플만큼 가늘고 안타깝고 그리운, 그리움이 다인 단수수 같은 사랑의 맛. 씹을 것도 먹을 것도 없는 단 맛의 나부낌….
그렇게 나는 펜팔로 여자 친구를 사귄 일이 있었다. 정말 코스모스처럼 가늘고 가냘픈 미소의 소녀…. 그녀는 늘 연분홍 편지 봉투에 예쁜 글씨로 사랑이란 말만 빼고 모든 아름다운 말을 빼곡 채운 편지를 보내오곤 했었다. 나의 편지도 연분홍 봉투는 아니었지만 갖가지 아름다운 상상으로 구름칠을 한 무지개 같은 것들이었다. 그 때는 '사랑'이나 '사귄다'는 말이 무슨 신성 모독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졌는지, 그녀와 나는 우리 사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안타까운 열기를 편지에 실어 보내곤 했다.
그렇게 해서 스토리도 없이 긴 긴 우리의 사연은 대학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신촌에서, 나는 이문동에서 가을의 쓸쓸한 날만 골라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했다. 그 때 나는 그녀가 폐병에 걸린 것을 알았다. 낭만주의 소설의 소녀의 종말은 늘 그렇듯이…. 우리는 만나면서도 늘 헤어질 준비를 한 연인 같지도 않는 연인처럼 길가를 거닐곤 했다. 그 때도 길섶에는 수많은 코스모스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때 기억을 쓴 시가 바로 '코스모스'라는 시이다.
사실 그 때 우리는 너무 바빠서 우리 삶에 사랑을 싣고 모실 자리는 없었다. 공부도 해야지 군대도 가야지 고시 준비도 해야지 유학 가야지…. 그냥 만나고 연애하는 거야 누구나 하지만 거기 어디에 그리움이나 연분홍 사연을 넣을 곳은 없었다. 키 큰 나의 소녀는 말 없이 어른이 되어갔고, 그녀의 초조와 안타까움과 나에 대한 야속한 심정은 늘 바쁜 나보다 더했으리라. 첫눈이 오던 어느날 내가 살던 홍제동에 온 그녀는 깊은 밤에 집에 안 돌아가겠다고 한 일이 있었다. 눈은 쏟아지는데….
그렇다, 우리는 다 그렇게 쓸데없이 키만 자란 어린아이거나 소년, 소녀…. 길가에 서 있는 코스모스들이다. 결국 집도 가정도 이루지 못하고 가을마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손님을 맞는, 그러다 늙어지고 죽음이 오면 억울해서 또 어떡하려고? 하하하. 결국 우리는 따로 돌아갈 곳이 없는 우주의 나그네, 혹은 길가의 코스모스들. 그래서 코스모스는 고향에 두고온 어여쁜 첫사랑처럼 늘 미안하고 아쉽고 안타깝다.
요즘은 어디에도 코스모스가 없다. 요즘 세상은 코스모스 보기가 참 힘들어졌다.
그것은 내 눈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 산에 가도 들에 가도 길가에 서도 실바람에 나부끼는 코스모스는 없다. 시골길에 간이역이 있고 공중전화가 있고 코스모스가 줄서 있던 옛날은 전설의 고향으로 갔나보다. 코스모스는 동네가 있고 이웃이 있고 전화할 애인도 있는 풍경에 꼭 필요한 주인공. 이제 다른 사람 필요 없고 자위하듯 휴대전화로 혼자 따로 사는 사람들이어서 코스모스도 공중전화도 필요 없다.
"공중 전화 이야긴데, 요즘은
혼자 사는 사람이 모두 다여서 공중 전화가 필요 없다
혼자 다 전화가 있으니까 공중 전화가 필요 없고
하기야, 코스모스가 없는데 무슨 공중전화 박스?
기적 소리가 없는데 무슨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