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지난 2007년 한나라당 시절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해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했다. 따라서 그가 유력 정당의 대권후보로서 야당 주자와 승부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후보는 올해 만 60세로,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속에 정치를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5선 국회의원을 거치며 고수해 온 '원칙·신뢰'를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대권 재수에 나서게 됐다. 만약 그가 이번 도전에 성공할 경우 건국 이후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父女)가 모두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 ||
아버지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2년 뒤인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에 들어가 '영애'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1974년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박 후보는 그해 8월 15일 어머니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에 급거 귀국, 약관 22살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이후 1979년 10·26 사태로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5년여간 퍼스트레이디 대행은 계속된다.
박 후보는 10·26 이후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와중에 1980년 18년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난다. 이후 서울 성북동 자택 등에서 무려 18년간 사실상 칩거에 들어간다.
■ 1998년 정치권 등장, 2007년 경선 패배→'대세론'으로 부활 = 박 후보는 18년간의 '칩거' 이후 46세인 지난 1998년 4월 대구 달성에서 치러진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2000년에는 총재 경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위로 부총재로 당선됐다. 2001년 상향식 공천, 당권·대권 분리 등을 골자로 한 '7대 당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 기간 북한을 방문,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 철도연결'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2002년 복당한 박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등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이어 치러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완승을 이끌어 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07년에는 첫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하면서 분루를 삼켰다. 그러나 이후에도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로 이른바 '대세론'을 형성, 당내 친박(친박근혜)계의 정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대표적인 것이 2009~2010년 정국을 달궜던 세종시 수정안 논란. 이 대통령과 달리 박 후보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했다. '신뢰'를 정치의 근간으로 내세운 박 후보는 '판정승'을 거뒀고, 이후 다시 당을 장악한다. 그는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면서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2012년 4·11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152석을 차지하는 대역전승을 거두며 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입지를 굳혔다.
/송수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