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겸 / 한국학 중앙연구원 연구실장
근래 일본이 한국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또다시 억지 주장하면서, 양국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한국은 '독도 합동기동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한다고 한다. 합동참모본부는 훈련 목적을 "이번 독도훈련은 외국 민간세력이 독도 영해를 침범 또는 접근해 오는 상황을 가정해 실시된다"고 한다. 즉 일본 극우세력 등의 '독도 도발'을 가정해서 훈련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조에 기록된 것처럼, 지증왕 13년(512) 6월에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인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함으로써, 울릉도와 함께 독도는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울릉도에는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병합하기 이전 시기에 우산국의 왕이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내용의 '우해왕(于海王)과 풍미녀(豊美女) 설화',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할 당시의 비화를 담은 '사자바위'와 '투구봉'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에 복속되기 이전에 우산국은 우해왕이 다스렸는데, 왕은 기운이 장사로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우산국은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매우 강했다. 이때 왜구들이 가끔 우산국에 와서 노략질을 하였는데, 그 본거지는 대마도였다. 우해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대마도 왕을 만나서 담판하였는데, 대마도 왕으로부터 앞으로 우산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항복 문서를 받고 푸짐한 대접을 받았다.

서로 사이좋게 지낼 것을 약속하면서 대마도를 떠나려 할 때 대마도 왕은 셋째 딸인 풍미녀를 우해왕에게 바쳤으며, 우해왕은 그녀를 우산국으로 데려와 왕비로 삼았다. 그런데 이후 왕은 나라 다스리는 일을 멀리하고, 사치를 좋아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심지어 신라에 몰래 쳐들어가 빼앗아 오기도 했다.

한편 우산국이 몰래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신라 백성들은 지증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신라왕의 명령을 받은 실직군주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먼저 사신을 보내어 우해왕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그는 신라군을 가볍게 여기고 도리어 사신을 죽였다. 이에 신라군은 배에 싣고 온 나무사자의 입에서 불을 뿜게 하고 또 화살을 쏘게 하며 군선을 몰게 했다. 결국 우해왕은 이사부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우해왕은 투구를 벗어던지고 항복하면서 이사부에게 "제발 데리고 온 사자 짐승을 남겨두어 그것이 이 섬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고, 이사부는 그 부탁을 듣고 나무사자를 배에서 끌어내 물에 띄웠다. 이때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쳐 나무사자는 사자바위가 되었고, 우해왕이 벗어던진 투구는 투구봉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와 전설은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많이 윤색되고 변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산국 우해왕이 대마도를 정벌하고 그곳 왕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보면, 이웃 나라 사이에 공주나 왕실 여자를 시집보내는 행위는 왕자나 왕의 아우 또는 왕실의 남자를 볼모로 보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대체로 힘의 논리에 의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국가간 협상의 부산물이며 동맹의 상징을 띤 정략결혼의 한 형태이다.

우해왕이 풍미녀를 대마도에서 데려와 혼인한 일이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되는 이유와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하나, 한편으로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매우 중요하고도 분명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독도훈련은 물론 서남 해안에서의 해상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독도가 우리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일본의 억지는 물론 이제는 미국의 한마디 말, 한 줄의 글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참 안타깝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의 해상활동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삼면이 바다인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해상훈련은 독도 뿐만 아니라 서해안과 남해안에서도 필요하다. 서해안에서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내몰아야 한다. 동해와 독도 근처로의 일본 선박의 접근과 조업을 막고, 만약에라도 있을 일본인들의 불법 상륙에 철저히 대비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