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훼손되는 육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상처받고 폭행당하며 유린당하는 여성의 몸은 우리가 정신이 아닌 몸으로 사는 시대, 영혼을 팔고 물질에 매인 시대, 사랑이 아닌 정욕으로만 여성을 바라보는 비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 오기를 꿈꾼다.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힘든 오늘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세상은 늘 우리를 배반하곤 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성폭행 사건은 엄청난 증식을 거듭하며 변종을 양산하고 있다. 가까운 이웃의 남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지킬 수 없는 장애여성이나 결코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없는 어린아이를 폭력적 욕구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아버지들이 친딸에게까지 야욕을 드러내는 등 최소한의 인륜의 경계마저 허무는 무차별적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고용주의 성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아르바이트 여대생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우선 남성과 여성, 고용주와 아르바이트생, 연장자와 연소자라는 대립되는 위치에서 전자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후자를 강압적으로 성폭행했다는 점이다. 위기에 처한 여대생은 그러한 문제적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청하지 못했다.
여성이 성과 관련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어 문제시하는 것은 매우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건 이후의 조사와 재판에 이르는 과정을 포함해서 주위의 수군거리는 시선까지 모두 감당하며 괴로움을 당하다 보면 차라리 묻어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번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여대생의 자살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의 고민과 절망 그리고 또 다른 결심과 좌절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혼자 겪으면서 스물세 살 여린 딸이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떠밀려갔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일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에는 이 여대생과 똑같은 고통으로 간신히 하루를 버티고 있는 여성들이 수없이 많이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가슴 속에 모든 것을 묻어두고 괴로워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죄를 범한 자는 살아있고 아무 죄 없는 희생자는 죽어버린 이 현실은 얼마나 모순으로 가득한가. 죽은 자는 자기를 변호할 말을 할 수 없고 산 자는 반박하는 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를 방어할 유리한 말을 실컷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부조리한가.
하여 산 자는 죽은 자를 더욱더 아득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죽음보다 더 강한 말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목숨을 걸었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진실은 없다. 자기를 버티게 하고 있는 남은 힘을 모두 모아서 죽음의 길을 떠난 이의 침묵이야말로 가장 무거운 진실일 것이다. 어느 누가 생을 걸면서까지 진실을 말하겠는가.
삶에 집착하는 것이 무릇 살아 있는 자의 본능이거늘 그 귀한 생명을 건 자의 침묵의 말이 어찌 살아 있는 자의 말보다 진실하지 않겠는가. 살아남은 자들은 말이 없다고 해서 죽은 이를 다시 죽이는 누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사방이 어둡고 아득하기만 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우리가 찾는 진실은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는가. 살아 있어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으로 진실을 말하고자 했던 스물세 살의 침묵 앞에서 저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볼 일이다.
그러나 그토록 어려운 죽음을 선택하는 대신 살아서 진실을 향해 끝까지 투쟁하는 자세를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깊다. 힘들지만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밝히고자 한 딸의 투쟁에 우리들 모두 동참해서 함께 행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죽음으로 자신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여대생 사건이 못내 안타까운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