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수 / 중앙대교수·문학평론가
높푸른 가을하늘과 선선한 가을바람을 거느리고 한가위가 다녀갔다. 여전히 귀성 행렬과 귀경 행렬로 고속도로는 막히고 모처럼 가족,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차례도 지내고 맛있는 음식도 나눠 먹으며 회포를 푸는 등 한가위의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도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농촌공동체의 전통이 담긴 말
풍습 사라지고 마음 가난해져
외로이 명절 보내는이 늘어가
더많은 구성원 행복 고민할때
'나눔의 정신' 회복이 답

명절이면 으레 전통시장을 돌며 친서민적인 행보를 보이는 정치인의 모습도, 식상한 추석 특집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을 가득 메우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우울한 소식들이 날마다 신문지상을 오르내리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바람을 주문처럼 외며 아직은 살 만한 세상임을 애써 긍정하려 하는 것도 이맘때의 일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은 그날만큼은 가난한 이웃들과도 음식과 정을 나누며 마음만은 넉넉하게 수확의 기쁨을 누리고자 한 농경사회의 풍습에서 유래된 말이다. 즐겁고 기쁜 일은 물론 슬프고 힘든 일도 함께 나누곤 했던 농촌 공동체의 아름다운 전통이 담긴 말이다.

말은 여전히 남아서 전해져 오지만 이웃과 더불어 정을 나누는 풍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더불어 흥성거리며 한마음으로 풍요를 나누기에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가난해졌다.

한가위 직전에 몰아닥친 태풍의 여파로 물가는 폭등하고 피해 복구는 진행 중이고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 등 사회 현안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의례적인 명절맞이 행사들만 요란했다.

이미 농촌 공동체 사회를 벗어난 한국 사회에서 과거와 같은 의미의 한가위를 고수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농촌을 지키는 공동체는 다문화 공동체가 된 지 오래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공존하는 오늘의 사회에서 일가친척이 한자리에 모여 맞이하는 과거와 같은 한가위의 풍습은 사라져 가고 있거나 겨우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세대 정도가 지나고 나면 한가위의 풍속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일찍이 서정주가 노래한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그 속에 푸른 풋콩 말아 넣으면/휘영청 달빛은 더 밝아오고/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고",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아 웃고/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리던"('추석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그런 추석은 이제 사라져 가고 있다. "막걸리 한 잔,"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어버이의 제사를 지내는" 천상병의 '혼자의 추석'('불혹의 추석')에 공감하는 이들이 차라리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북적대는 일가친척들과 맛있는 음식과 새 옷 특유의 풀 먹인 냄새와 감촉에 둘러싸여 보낸 풍요로운 명절의 기억을 뒤로 한 채 편의점의 삼각 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외롭고 쓸쓸하게 명절을 보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찾아갈 고향이 없거나, 고향에 가도 함께 할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어도 함께 명절을 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들에게 한가위는 더 이상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의미일 리 없다.

좋은 전통을 잘 계승하려면 단지 과거의 풍속을 잘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재적 요구와 의미를 더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일이 필수적이다. 농촌 공동체 사회를 토대로 한 명절 풍습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 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농촌 공동체 사회에 기반을 둔 과거의 우리 사회는 가족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지로는 이웃들과도 많은 것을 나누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가족 이기주의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것은 오히려 최근의 일이다.

내 아이, 내 가족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가족 이기주의는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양립하기 어렵다. 가족 이기주의가 뿌리를 내린 사회에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와 경쟁에서 무조건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가 양산되기 쉽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먼저 쳐야 한다는 식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의 구성원은 불안에 지배당하기에 좀처럼 행복해지기 어렵다.

이제 우리 사회는 더 많은 구성원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가진 게 넉넉지 않아도 이웃과 더불어 나눌 수 있었던 시절에 적어도 우리의 마음은 여유로웠다.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한가위의 참의미는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 있을 것이다. 추석날 밤에 본 보름달을 떠올리며 저마다 가슴 속에 둥근 보름달 하나씩을 품고 넉넉해질 수 있는 날을 몰래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