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나날의 삶이 불공정하다는 정서적 공감이 결코 쉽지 않는 개념인 '공정'과 '정의'라는 인문학의 바다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샌델은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학자다.
표심 잡기 나선 대선 후보들
사회정치적 철학 없는
무분별한 영입·민생행보
담합과 줄서기를
국민통합으로 둔갑시켜
유권자의 정확한 통찰력 필요
그의 정의와 공정의 개념은 사회와의 유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고유한 문화 및 전통의 배경에서 형성된 공동체 의식이 사회의 상대적 형평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정의관과 맞닿아 있다. 이것이 공동체의 붕괴를 막고 사회구성원의 행복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사회정치 철학의 기저이다.
18대 대선을 가르는 시대정신은 경제민주화와 통합이다. 새누리당이 19대 총선에서 경제민주화라는 일견 야권과 진보 진영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어젠다를 선점하여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으나, 경제민주화는 여야, 보수와 진보 모두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자,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
통합은 경제민주화와 별개의 의제가 아니다. 일반적 개념으로 '민주화'란 소극적 의미로는 절차적 정당성을 뜻하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이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사회구성원의 실질적 평등권 보장을 의미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전자의 절차적 측면을 의미하는 민주주의의 최소한은 민주화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후자의 실질적 평등권과 복지의 충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의 배려가 수반될때 비로소 형식과 내용에서 민주주의는 명실상부한 이름값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는 바로 실질적 민주주의의 착근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반영된 것이다. 즉 경제민주화란 경제적 민주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를 향한 공동체의 노력과 제도적 확립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전제될 때 밑그림이 완성될 수 있다.
급식과 교육, 보육의 무상시리즈나 선심성 복지 공약, 그 자체가 경제민주화의 내용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경제민주화를 통한 빈부격차의 완화나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득권층의 경제적, 사회적 배려가 제도적 보완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 공동체의 원심력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표를 얻기 위한 후보들의 이른바 '민생행보'와 무분별한 '영입'은 경제민주화와 통합을 예지(叡智)하는 철학을 담고 있지 않다. 사회경제적 형평과 분배의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가운데 사회통합의 밑그림이 그려질 것이고, 이것이 정치통합으로 연결되는 것이 경제민주화와 통합의 선순환이다.
후보들의 주장으로 정치권의 유행처럼 치부되고 있는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은 논리적 정합성에도 불구하고, 자칫 성장에 방점이 찍힘으로써 지난 대선의 줄푸세나 747공약의 동어반복이 될까 두렵다.
더구나 표심을 얻기 위한 소위 외연 확장이나 중도층 잡기 경쟁은 좌우 양쪽의 지지를 끌어모으려는 정당의 포괄정당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에서는 이념적 지향을 상실한 공허한 눈속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유권자의 정확한 통찰과 성찰이 없이는 정치인들의 능숙한 정치공학적 유혹에 현혹될 개연성이 어느때보다도 높은 것이 이번 대선의 흐름이다. 철학 부재의 탈근대시대에 샌델의 저서가 그토록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한 것은 역설적으로 생활정치에 긴요한 정치철학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선거과정과 캠페인을 통하여 그 사회의 집단지성의 흐름을 형성해야 할 대선은 정치공학의 난무와 이념적 잣대가 모호한 인사들의 무분별한 영입 경쟁으로 점철되고 있으며, 담합과 줄서기가 국민통합으로 둔갑하고 있다.
샌델이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역설한 정의에 공감했던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간구와 열망을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는 모르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있는 깜냥이 안되는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 외면하는 것인가? 70일 남짓 후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그가 공동체의 지향을 성찰하고, 시대 및 역사를 마주하는 통찰이 있는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