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형 경희대 중앙도서관장
요즘 대선을 앞두고 뉴스를 듣고 토론을 보며 솔찬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광고에 어린아이가 나와 "우리 아빠는 뉴스를 보고 또 뉴스를 보고…"하는 말이 나에게 하는 말 같이 들려 민망하다. 훌륭한 대통령을 기대하는 마음 하나로 관련 프로그램을 보고 또 본다. 후보들 가운데는 말을 아끼는 사람도 있고, 수사가 뛰어난 사람도 있다.

토론에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언변이 유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말을 참 잘한다는 점이다. 아니, 말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남이 말을 못하게 하면서 혼자 말하려 한다.

'침묵은 금'이란 말 무색하게
어딜가든 쏟아지는 말… 말…
두서없이 무책임하게 떠들다
지적 받으면 적당한 변명뿐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
바른 언어 실천에 달려

어딜 가나 둘 셋만 모여도 시끄러워 견디기 힘들 정도이다. 조용한 식당을 찾아보기 어렵고 버스에서 차분히 머리를 식혀가며 가는 것조차 지나친 호사로 여겨진다. 그 좁은 엘리베이터 안도 예외 없이 시끌벅적하다. 오죽하면 말 많은 사람들을 두고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것'이라 하겠는가. 어찌 그렇게 말들을 잘 하고 왜 그렇게 말이 많은지.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옛사람들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말에 대해 책임을 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도무지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그저 근사하게 들리거나 재미있으면 되고, 나중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으면 적당히 변명을 하면 그만일 뿐이다.

군대를 갔다 와서 4학년에 복학하여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 수업 시간이었는데, 한 학생이 거침없이 발표를 잘 하고 들어갔다. 선생님은 조용히 웃으시면서 우려 섞인 말씀을 하셨다. "너무 말을 잘 하는 걸 보니 너는 조심해야겠다." 그 순간 우리는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하여 아이를 출산한 학우가 있어서 친구들이 약간의 돈을 걷어 과대표에게 선물로 전달하라고 했는데, 그 학생이 그 돈으로 술을 사먹은 일이 불과 며칠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는 마치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시는 듯 제자를 심히 걱정하고 계셨다.

오래 전의 일인데도 원로 여류시인 김남조 선생이 어느 날 TV에 출연하였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다. 진행자가 시에 대해서 한 말씀 해달라는 요청을 하자 "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인생이 중요하지요"라는 답에 상당히 감동받았던 적이 있다. 작가야말로 '언어의 마술사'라 할 만큼 언어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비단 작가에게만 언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언어는 필수적인 요소인데 문제는 그 언어가 '믿음'의 본질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언어에 달려 있다는 것은 믿을 신(信)자가 사람(人)과 말(言)을 합쳐 이루어진 글자임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말과 사람이 일치할 때만이 '신(信)'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인간에게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신뢰요, 신뢰는 곧 언어의 실천에 달려있다.

'논어'에는 말을 경계하라는 구절이 수없이 나온다. "군자는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제자 안연이 나라 다스리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는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하라. 그는 위태롭다"고도 했다.

불교 '천수경'의 첫머리에서는 "입으로 지은 죄업을 정화하는 일이 깨달음의 시작이라"고 했다. 성경 또한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혀를 조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입술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쩌다 술을 많이 먹은 날은 기분이 좋기보다는 괴로울 때가 많다. 돌이켜 보면 필요도 없는 말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많이 한 것이 후회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다변췌사(多辯贅辭)에 나를 풀어놓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해보기도 한다. 아무리 절제하려 해도 뜻하지 않게 말도 많이 하게 되는 현실에 살면서, 화려한 수사로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말 없이 진실한 사람이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