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운요호 사건'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강화도 사건'이라고 한다. 이 운요호 사건의 최대 피해지역은 영종도였다. 1875년 9월에 있었다.
朝 개방 목적 아닌 일본단합 위해 침략
최대 피해지역 '영종도' 사망자 35명
9일 오후 2시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진행된 2012 인천시민 인문학강좌 하반기 3번째 강좌에서는 김흥수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뜻밖의 봉변, 雲揚號 사건'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김흥수 교수가 '뜻밖의 봉변'이라고 표현했듯이 운요호 사건은 영종 주민과 군인들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기록을 토대로 한 김 교수의 얘기에 따르면, 1875년 9월 22일 오전 7시43분 일본군 28명이 보트 2척에 나눠 타고 영종 해안으로 접근했으며, 조선군이 발포했지만 일본군은 영종성을 함락시켰다.
이 전투로 35명이 죽고, 16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일본군은 '암상산봉' 정상에 국기(일본기)를 꽂고 점심을 먹었다. 일본군은 영종성을 불태우고 대포 36문 등 무기류를 노획하고 11명을 생포해 운요호까지 노획한 물건들을 나르게 했다.
이날 저녁, 운요호에서는 램프로 휘황찬란한 조명을 꾸미고 주연(酒宴)을 열고, 승리를 축하했다. 영종도에서 노획한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축하연'은 계속됐다.
당시 일본군의 영종도 공격은 강화도 침략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
운요호 사건은 쇄국정책을 취한 조선의 대외 개방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일본의 1차적 목적이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김 교수의 얘기다. 운요호가 조선 영해를 무단 측량하고 무단 침입해 조선의 포격을 유도한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이 운요호 사건은 결국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로 이어졌다.
운요호 사건은 1875년 초부터 일본 국내 정치권에서 벌어진 정부 변혁운동의 국면을 타개할 대외적 위기 조성용으로 기획되었다는 게 김 교수 등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바로 이 점이 운요호 사건의 제1차적 목적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특히 외교문서까지 조작해 운요호 사건에서 발생하는 국제법적 문제를 가리려고 시도했다.
1875년 9월 19일 영종도가 바라보이는 월미도 연안에 운요호가 닻을 내렸다.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30분 월미도를 출발해 영종도 부속도서인 매도(鷹島)를 북서쪽을 바라보면서 닻을 내리고 오후부터는 함장 이하 20명이 측량을 하고 보트를 타고 강화도로 향해 나아갔다.
오후 4시22분 초지진 포대 앞에 도착했다. 오후 4시30분, 초지진에서 크고 작은 포를 발포했고, 일본군은 응사하면서 본함으로 되돌아갔다. 운요호는 21일 오전 8시 돛대에 국기를 게양하고 전쟁 준비를 했다. 전날 초지진에서 일본군을 향해 포를 쏜 '죄'를 치죄한다는 이유였다.
이날 낮 12시40분까지 1시간 50분 동안 일본군은 포탄 27발을 초지진을 향해 쐈다. 진지 2개소를 파괴했다. 당시 조선군도 응사했는데, 한 발도 일본군 측에 명중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앞에서 이야기한 영종도 공격을 가했다.
일본 측은 영종도 공격을 일종의 정당방위로 조작했다. 또 운요호 사건은 일본 내에서 정한론(征韓論) 확산으로 이어진다. 조선측의 폭거로 역선전해 정한론을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1876년 2월 27일 군함을 대동해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강요했다.
다음 네 번째 강좌는 오는 20일 강화도 일대 현장답사로 진행된다. 현장답사는 류창호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의 인솔로 이뤄진다.
/정진오기자
경인일보·인하대·인천시립박물관 공동주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