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고대사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여러 편 방영되었는데, 얼마 전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왕을 모두 황제폐하라고 호칭하고 있다.
우리의 고대에는 국왕이 직접 황제를 칭한 왕은 보이지 않고 대왕을 칭하고 폐하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황제폐하가 아니라 대왕폐하라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대왕·황후·태제' 호칭과
독자적 연호의 사용
황룡사9층탑 등에서는
중국과 별개의 세계관 표현
드라마서 정확한 용어사용
잘못된 지식 전달 막아야
왕조국가에서는 최고통치자인 군주의 지위에 따라 권력구조가 황제국의 틀을 취하거나 제후국의 틀을 취하여 그 형식을 달리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국가의 대외적 지위가 달라지고 그것이 국가의 위력을 표현하고 있었다.
전통시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에 가장 근접한 외국은 중국에 향해서는 주변 번국의, 국내에 대해서는 독립의 이중 체제를 취하였다. 이는 중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체면상으로 양보하지 않으면 공격을 받거나 외교상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있었고, 아울러 국내에 대해서는 한 나라의 군주는 절대 존엄하지 않으면 그 지위가 보존되지 않았던 것에 이유가 있다.
실제로 중국의 주변국들은 황제국에 예속되었던 왕국에 만족하지 않고 비록 정도는 달랐지만 각각 나름대로 자기중심의 독자적인 국제질서를 상정하고 있었다. 한국 역사상의 왕조들도 그러하였다. 독립성의 정도는 고려 중기 이전에는 이후에 비하면 훨씬 높았다. 고려 중기, 즉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이전까지는 제도적으로 황제국의 체제였다.
지금도 중국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당의 제후국 정도로 보려는 시각이 있다. 신라는 대외적으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속하였고, 내부적으로도 여러 면에서 제후국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단순히 중국 왕조, 특히 당나라의 제후국에 불과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신라도 '대왕' 칭호와 독자적 연호의 사용을 통해 황제국을 표방하였다. 신라 국왕과 왕족은 황제적 지위와 황족의식을 가졌고, 신라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이 존재하였다.
신라 국왕은 일찍부터 천자적 존재였다. 우선 신라 중고기의 왕들은 건원, 개국, 태창, 홍제, 건복, 인평, 태화와 같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국왕을 대왕이라 하면서도 때로는 '태왕'이니 '제'와 '제왕' '황왕'이라 하였고, 스스로 '짐'이라 하면서, '순수'니 '붕' '인산'이라는 용어, '태종'과 같은 칭호를 사용하여 황제적 위상을 표현하였다.
신라 국왕이 황제의 지위를 가졌음은 친족용어에서 확실하게 보인다. 우선 국왕의 아내를 '황후' 또는 '왕후'라고 하였으며, 왕위계승자를 '태자', 왕의 어머니를 '황태후' 또는 '태후', 왕의 아우를 '태제'라고 한 것들이 있다. 이것은 이들 호칭의 중심이 되는 대왕이 황제적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한편 신라는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나름대로 독자적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황룡사9층탑을 세우면서, 1층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유, 6층 말갈, 7층 거란, 8층 여진, 9층 예맥 등 9한을 진압시킨다는 신라 중심의 독자적 세계관을 드러냈다.
이와 더불어 신라는 당시 발해와 일본 등 주변국을 번국으로 인식, 상정하는 나름대로의 천하관과 신라중심의 국제질서를 설정하였으며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 국왕은 내적으로는 황제적 지위를 가진 군주이고, 그 친족은 황족의식을 가졌었다.
비록 외교상으로는 중국왕조로부터 책봉을 받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또 통치기구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모방하고 제후국의 제도를 표방하여, 당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재되었지만, 국내적으로는 나름대로 독립국의 위치를 가졌다.
역사 드라마는 물론 언론과 책은 역사의 대중화라는 긍정적 작용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만큼 역사용어는 사실에 근거하여 신중하고도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잘못된 사용과 지식의 전달은 대중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고 또 다른 역사 왜곡을 낳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