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년과 33년이라는 짧지않은 세월, 안타까움과 처량한 탄식만 나올 뿐, 그 긴 세월에 우리의 삶이 보람된 생애였다는 아무런 징표도 없으니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후퇴만 되고 있는데….
간추린 일기
4·19를 고등학교때 겪었고, 대학에 들어와 6·3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날을 세웠으며, 그런 와중에 '신망잃은 박정희 정권 하야를 권고한다'라는 최초의 하야권고 시위로 확대되면서 첫 번째로 학생의 몸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오래지않아 풀려났으나, 65년에는 한일협정비준 반대로 싸우다가 마침내 월남파병 반대 시위에 앞장서다가 두 번째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았다.
몸이 풀려나오자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기다리기에 강원도 전방에서 3년 세월을 국토 방위로 젊음을 보내고 말았다. 68년에야 제대하여 그해 가을에야 재입학으로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69년에는 3선개헌 반대의 시국에 또 기웃거리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대학 교수가 되려고 몸을 굽히고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있을 때, 마침내 72년 영구독재가 완전무결하게 자리잡는 유신이 선포되고 말았다.
정말로 암담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되고 모든 법과 헌법까지 확실하게 중단되어 한 사람의 말이 법이고 헌법인 절대 권력으로 장악되는 엄연한 역사의 현실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지켜보던 그때, 참으로 분개하고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이런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야 된다는 것인가.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따위 통곡이 어떤 힘을 발휘했으랴.
최초의 유신반대 투쟁
계엄령으로 군이 온갖 권력을 장악한 그때, 맨주먹인 국민들이 무슨 용맹을 부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나의 모교 전남대학교에서는 마침내 그해 12월초 유신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함성'이라는 지하신문이 학교와 시내의 곳곳에 뿌려지는 쾌거가 일어났다. 죽음을 각오한 내 후배 대학생들이 일으킨 거사이자 의거였다.
고등학교 교사이던 나는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학교에서 잡혀가 경찰국 공작분실의 지하에서 숱한 고문과 강압에 의해 '함성'과 '고발'을 제작하여 국가반란을 예비 음모한 수괴로 둔갑되고 말았다. 내가 잘 알고 지내던 동지이자 후배들이 했던 일인데, 나를 지령한 수괴라고 시나리오를 만들어 기소하고는 73년 연말까지 독방의 감옥에 처박아 버려 그해 내내 법정에서 싸워야 했다.
교수가 되려던 꿈과 희망은 무너지고, 고문에 망가진 몸만 남아 앞이 캄캄한 세월이 그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해 연말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아픈 몸을 이끌고 출소하였다.
생사람 잡아다가 고문으로 간첩도 만들고 역적으로도 만들어 인생을 파탄시키고, 통치자 한 사람만 천하의 자유를 누리며, 그의 추종자들만 한세상 만났다고 삶을 구가하던 시절이 유신독재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40년이 흘렀고, 그 종말을 고한지가 3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런 과거사가 말끔히 정리되지 못하고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되고 있으니, 이런 기막힌 세상이 지구의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춘추필법은 무섭다
세상에 무서운 것은 총도 아니고 칼도 아니다. 역사는 반드시 진실만이 승자가 된다. 시간이야 아무리 지연되더라도 결코 역사적 정의와 진실만은 묻히지 않는다. 역사에 맡기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역사란 어떤 것인가. 역사에 기록되는 진실과 정의가 바로 춘추필법이다. 진실과 정의의 힘은 모든 권력과 역사를 뒤엎을 수도 있지만 거짓과 불의에는 무서운 필주(筆誅)를 내리기도 한다.
유신이 불가피했고 옳았으며, 독재가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믿는 사람들, 춘추필법은 거짓과 불의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세월이 지났다고 관대해지지 않는다. 필주는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