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단국대 석좌교수
'불신 시대', '불신 사회', 참으로 어느 것 하나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바로 오늘의 사회다. 그런 가운데서도 더더욱 불신의 수렁에 빠진 분야는 바로 '정치 불신'이다.

지위가 높고 책임이 무거운 지도자일수록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고, 하는 짓마다 국민을 속여 먹는 작전에 능숙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정치 혐오증에 걸려 무조건 정치인은 싫고, 정치는 타기의 대상에 오른 지 오래되었다.

정치 없이는 나라도 안 되고 세상도 돌아가지 않음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처럼 정치를 혐오하는 이유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지겹도록 거짓말만 하던 자유당 독재의 12년, 억지로 헌법을 고쳐 정권 연장을 지속했던 위대한 거짓, 그것도 부족해 역사에 없는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국민의 분노로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독재는 무너졌었다.

정치 불신이 이제나 가실까 여길 때, 5·16쿠데타로 정치 불신과 사회 불신은 가속화의 길을 걷고 말았다. 군에 복귀한다는 약속을 뒤집고 정권을 잡은 쿠데타 주역의 식언(食言)이 계속되면서 정치는 바로 나락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국민을 속이는 정권 연장이 계속되고, 신조어인 '번의(飜意)'라는 추악한 용어가 신문을 도배하면서 정치에 믿음을 갖는 사람은 세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3선 개헌의 그 엄청난 정치 속임수에 영구집권의 '유신'까지 선포되었는데 국민의 누가 정치에 신뢰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역사가 뿌리를 내리고, 집권과 정권 연장을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아낄 필요가 없다는 몰상식이 통하면서 정치 불신은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2012년 중반부터 오늘까지 몇 개월, '안철수 현상'은 바로 이런 정치 풍토에서 탄생한 부산물이며, 메시아를 갈망하던 민중의 염원이 모인 바람이자 희망이었다. 진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거짓이 온 세상을 지배한다고 여길 때, 정당도 싫고 구정치인도 싫고, 낡은 것이나 거짓은 더욱 싫다는 국민의 마음을 뒤흔들어준 사람이 바로 안철수라는 우람한 정치 신인이었다.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신인이 꼭 정치를 잘하리라는 확신도 없으면서, 믿음이 가고 거짓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대통령 후보로서의 여론조사 수위를 달릴 수 있었다.

이제 그는 후보직을 내려놓고 말았다. 정권교체와 야권 단일화라는 시대적 대의와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그 많은 지지자의 붙잡음과 애통 속에서도 미련 없이 사퇴를 결행하고 말았다. 대단한 일이다. 정치는 그래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이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그는 장엄하게 뜻을 접었다.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도자들이 많았다면, 어떻게 이 나라와 사회가 이렇게 무서운 정치 불신에 빠져 있겠는가. 공자(孔子)는 오래전에 말했다. 먹을 것이 많은 것보다, 강한 군대보다도 더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은 국민이 정치를 믿어주는 일이라고 했다. 불신의 깊은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한, 한국 정치의 장래는 어둡다.

여기에 한줄기 청신한 바람을 불어넣어 준 안철수 현상, 약속을 지키겠다고 대통령의 꿈도 접어버린 결단, 그런 싹과 움에서 우리의 미래가 설계되어야 한다. 정치를 꿈꾸는 사람에게서 그런 믿음의 정치가 어떤 것보다 상위 개념의 '가치'라는 생각, 그 점 하나로도 안철수 전 후보는 위대한 정치라는 선물을 우리 국민에게 선사하였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이른바 6·3세대라는 우리, 식언·번의라는 기만적인 정치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 세대였는가.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본연의 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속임수에 걸려들면서 우리는 정말 얼마나 속고 또 당했던가.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에 또 속아, 그 뒤로도 5공·6공의 군인들에게 우리는 또 얼마나 당했던가.

1987년 양김(兩金)의 단일화 실패에 우리는 또 얼마나 불행했던가.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다. 정권교체라는 대의(大義)를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서운함을 접고 다시 뛰어서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주는 일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시대적 큰 가치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