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인간의 삶에서 중요
'어떡하면 남들과 잘 지낼까'
누구나 화합에 대해서 고민
전체속에서 개성을 중시하는 것
민주적·창의적인 조화의 기본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 필요
평소에는 편안하고 좋은 사이이다가도 일로써 만나는 관계가 될 때면 예기치 않게 힘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다른 이름을 '관계'라고 하듯이 결국 관계가 우리의 삶에서 관건인 것 같다. 이러한 점은 공적인 생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떡하면 학교나 직장이나 공공의 일터에서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며 잘 지낼 것인가 모두가 고민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화합이나 조화의 가치에 그토록 연연해 하는지 모른다.
얼마 전 '경기도문화의전당'에 국악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의 주제는 화합과 조화였다. 국악과 외국음악, 관현악과 타악의 만남이었는데, 특히 작은 중국의 양금이나 인도의 타블라(북)가 거대한 한국 관현악과 협주하면서 또렷하게 자기 소리를 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힘을 가진 것은 작은 것을 배려하고 비록 작지만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진정한 조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장 이상적인 부부상은 각자 단단해지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 보완을 통해 각각 충실해질 수 있다는 논리이리라. 그래서 다를수록 더 멋진 부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고. "부부가 똑같애", "부부가 닮았어"라고 하는 표현은 전적으로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조화는 궁극적으로 창조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 창조적인 조화와 관련하여 공자의 '예(禮)'가 떠오른다. 공자의 최대관심사는 예였다. 그는 주나라의 사회질서가 붕괴되고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의 국정이 문란해지는 것을 뼈아프게 지켜보면서, 예를 통해서 현실을 바로잡고 싶어 했다.
예는 개인의 사회적 역할을 전제로 하는 규범이다. 공자의 꿈과 주장인 예는 바로 '이름을 바르게 하라'는 정명(正名)사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제나라 경공이 정치가 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했다.
인(仁)을 바탕으로 한 공자의 위민정치사상은 이처럼 예를 다해 정직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예요, 그 예를 통해서 인이라는 전체적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겠다.
불현듯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도 생각난다. 동물원에 가보면 호랑이가 인간을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주시하는 것 같다. 대자연을 종횡무진 뛰어다녀야 할 맹수를 우리 속에 가두어 놓은 인간을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할까.
몇 년 전 사무실에 있었던 작은 화분 속에 철사로 감아 사람들의 마음대로 모양을 만들어 놓은 여린 소나무가 얼마 되지 않아 시들어 죽었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강아지를 교미를 못하게 거세하고, 짖지 못하게 성대수술을 하며, 변 처리를 고려해 먹이대신 알약을 먹인다고 한다. 꽉 끼는 귀여운 옷을 입혀 집안에서 기르면서 미안해 하기는 커녕 즐거워만 하고 있는 건 과연 옳은 것인지.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고 동물은 동물다워야 할 것이다. 모든 존재가 자기의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고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존재의 이유에 답하는 길이 될 것이라 여긴다.
전체 속에서 개성을 중시하는 것이 민주적인 조화라 한다. 우리가 좋아하고 추구하는 조화가 진정한 창조적 조화가 되려면, 그 조화는 정명사상에서 시사하듯 어느 가족, 어느 집단, 어느 사회든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책임)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겠다.
어른은 어른답고 학생은 학생다우면 얼마나 정당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이이구동(以異求同)'이라고, 다름을 인정하고 협력을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