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때 '대통령의 딸' 삶 시작 22살에 퍼스트레이디
아버지 서거후 은둔생활… IMF때 정계 입문 결심
당 위기마다 '구원투수' 부드러운 카리스마 강점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쓰기 이전에 신뢰와 원칙으로 무장한,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이었던 그가 무너진 나라살림과 양분된 대한민국을 구해낼 리더로 다시한번 발돋움하려 하고 있다.
■ 22살의 퍼스트레이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2일. 박 당선자는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당시 육군본부 소속이던 박정희 대령과 육영수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 당선자 가족은 셋집을 전전하다가 1958년 서울 신당동 집으로 이사했다. 박 당선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2년 후 아버지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박 당선자도 '대통령의 딸'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박 당선자의 눈에 청와대는 아이들이 놀기엔 다소 심심한, 그저 '넓은 집'일 뿐이었다. 어머니 육영수도 아이들이 특권의식을 갖게 되지 않을까 염려해 한동안 박 당선자와 동생 근령씨를 외할머니 이경령과 함께 신당동 집에 머물도록 했다.
청와대로 옮긴 후에도 학교까진 전차를 타고 다녔다. 도시락 반찬은 계란말이와 콩자반. 다른 친구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학창시절이었다. 박 당선자의 친구들은 그를 "겸손하고 절제했다", "슬플 때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고 기억하고 있다.
1970년, 역사학과에 진학하길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과는 반대로 '산업 역군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남들 다 하는 미팅 한 번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밤낮 실험과 책에만 빠져 지내는 '모범생'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 등으로 대학가에 반정부 바람이 불자 박 당선자는 점점 더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가슴 설레는 순간도 있었다. 지난 1월,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박 당선자는 "대학교 때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인생의 전환점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중이었던 박 당선자는 학자로서의 꿈을 포기한 채 귀국해야 했다. 당시 22살. 아버지 박정희의 국정 파트너가 되기엔 결코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박 당선자는 묵묵히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매일 아버지에게 조간신문을 읽어주고 기업체 방문, 국토 시찰을 다닐 때도 함께 했다. 봉사활동부터 외교 정상 회담까지 발길이 닿아야 할 곳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5년 뒤, 아버지마저 서거하자 박 당선자는 청와대에서의 삶을 끝내고 신당동 집으로 돌아갔다.
■ 은둔생활
신당동으로 돌아온 박 당선자는 동생 근령·지만씨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었다. 당시 박 당선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6억원을 '생활비로 쓰라'며 받았는데, 이는 지난 4일 1차 TV토론에서 이정희 전 후보의 지적으로 한 차례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82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부모님 유품을 보관할 장소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마련해 준 서울 성북동 집으로 이사하면서 신 회장과 약혼을 한 게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동생 근령씨의 이혼과 지만씨의 마약 복용 등 박 당선자 주변은 늘 시끄러웠고, 박정희 정권 시절 우군이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박 당선자가 '신뢰와 원칙'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배신에 질색하게 된 때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난 2007년 박 당선자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의 첫 번째로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를 꼽았다. 반면 '살면서 가장 허무할 때가 언제인가'라는 질문엔 '믿었던 사람이 다른 행동을 할 때'라고 답하기도 했다.
제5공화국 시절, 박 당선자는 영남학원 재단 이사(1980~88년), 육영재단 이사장(1982~90년)을 지냈고 이후에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1993년~), 정수장학회 이사장(1994~2005년), 한국문인협회 회원(1994년~)으로 활동했다.
5공 시절이 끝나고 박 당선자는 본격적으로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명예 회복 운동을 시작했다. 198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1년 전부터 각종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기념사업회를 꾸리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근화봉사단을 조직하고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책과 영화를 만드는 데도 열심이었다.
■ 정치인 박근혜
정치권의 러브콜을 사양하던 박 당선자가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된 건 IMF사태 때문이었다. 무너지는 국가 경제를 보며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박 당선자는 1998년 4·2 재보궐선거에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 이른바 '달성대첩'으로 불렸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다.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02년엔 이회창 총재 1인 체제에 반발, 당을 탈당하기도 했지만 2년 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과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으로 흔들리는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전면 등장한다. 당 대표 취임 후 한나라당 중앙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는 등 개혁 끝에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얻는 성과를 거둔다. 그 후 2006년 6월 대표에서 물러나기까지 2년 3개월간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다.
'선거의 여왕'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2006년 서울 신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지원 유세 도중 피습을 당한 것. 대수술 끝에 고비를 넘긴 박 당선자가 눈을 뜨자마자 "대전은요?"라고 당시 최대 경합지였던 대전의 상황에 대해 물었던 사실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선 이명박 후보와 불과 2천여표 차이의 접전 끝에 고배를 마셨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 이 대통령 진영과 박 당선자 진영은 번번이 갈등을 빚었다. 같은 해 총선 공천 과정에서 주요 친박인사들이 떨어져나갔고, '친박연대'라는 정당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양 진영의 대립은 2009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당시 정점을 찍었다. 박 당선자는 "충청도민들에게 약속한 일"이라며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수정안에 거세게 반대했다.
2011년 12월 경기침체 등으로 정부와 여당에 등돌린 민심을 다시 세우기 위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고치고 당색을 붉은 색으로 바꾸며 친이계를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등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혀 19대 총선에서 승리한다.
■ 신뢰와 원칙, 외유내강의 여성 대통령
박 당선자를 대표하는 말은 단연 '신뢰'와 '원칙'이다. 지난달 29일 박 당선자가 수도권 유세에 나섰을 때 취재진이 시민들에게 박 당선자를 지지하는 이유를 묻자 시민들은 "믿음이 간다",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키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답했다. 갑작스러운 피습을 당한 후에도, 손이 부어 한 손에 붕대를 감고도 꿋꿋이 유세에 나서는 그의 신뢰와 원칙의 행보가 '소신있고 안정감있는 리더 박근혜'를 만든 것이다.
여성 특유의 세심함과 부드러운 리더십이 빛을 발할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박 당선자 측 인사는 "박 당선자 특유의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아래부터 위까지 대한민국 곳곳을 화합시키는 데 큰 몫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박 당선자 스스로도 "어머니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옆에서 동행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대선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