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수 고려대 그린스쿨대학원 교수
12월 내내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12월 추위로는 1956년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엄동설한이란 말이 실감난다. 지구 온난화의 업보인지 기후변화의 역설인지 몰라도 그렇지 않아도 경제난에 움츠러든 어깨가 더욱 힘들어 진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엄동설한이라는 말을 잊고 살았던 듯싶다. 1960~70년대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도 길었다. 초등학교 때 쉬는 종이 울리면 추운 교실 안에 있기보다 바깥으로 나가 양지바른 건물 벽에 붙어 서서 해 바라기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봄이 기다려졌었다. 그 때 우리가 기다리던 봄은 등 따습고 배부른 시절에의 염원이었다. 그래서 봄은 간절함이었고 희망이었다.

2012년 겨울. 이제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 무엇인가. 학교는 전기난로와 중앙집중식 난방으로 훈훈해졌지만 예전처럼 씩씩하고 생기발랄한 아이들의 모습은 없다. 정신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이 내몰린, 벌써부터 지쳐버린 영혼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을 뿐이다.

등 따습고 배부름을 실현한 자랑스러운 우리, 그러느라고 너무 바쁘고 각박했던 우리, 그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트라우마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는 우리, 그래서 아이들에게서마저 여유를 박탈하고 있는 우리. 얼마나 더 따뜻하고 얼마나 더 배가 불러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봄은 이제 더 이상 등 따습고 배부름을 갈구하는 상징이 아니다. 봄은 따스함, 봄은 밝음, 봄은 푸르름, 그리고 자유로움인 그 본래의 의미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봄을 만끽할 수 있게, 꿈을 꿀 수 있게 놓아 줄 때가 된 것이다.

방법은 있다.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당겨쓰는 사교육의 상업 마케팅을 금지하고, 학교 선생님들이 보람을 캐는 교육자의 자리로 돌아오고, 정치는 양질의 직업을 많이 만드는데 능력을 발휘하는 제자리로 돌아올 때에 가능하다.

1960~70년대의 봄은
배부른 시절을 향한 간절함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
따스함, 밝음, 푸름, 자유로움…
각박했던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아이들에게 여유와 꿈을 줘야


희망적인 것은 우리사회가 삶의 가치의 다양성을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신분상승이라는 구시대의 낡은 관념에서 떨쳐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직도 매달리고 있는 신분상승을 위한 무한경쟁의 의미는 과연 있는 것일까.

아니 지금 우리에게 신분이란 것이 있는가? 신분에 의한 제약이 있는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신분에서 자유롭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이루어온 가장 중요한 경쟁력 중의 하나이다. 반상의 신분과 사농공상의 순서가 없어진지 오래고 고위관료, 판검사, 국회의원이 높은 신분이라고 인정받는 시대도 지나갔다.

젊은이들의 배우자 직업 호감도 기준이 교사, 공무원 같은 안정추구형으로 변하고 있다는 조사가 있었다. 불확실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대기업, 의사, 변호사는 돈은 많이 벌지만 자기 시간이 없어서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 신분의 기준은 잘사는 것이고 그 잘사는 것의 기준은 벼슬의 높이와 돈의 많고 적음에 국한되고 있지 않다. 각자의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서 정해지는 때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가 옛날과는 달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돈과 권력만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었던 시대와는 다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등 따습고 배부른 바탕을 만든 기성세대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정작 그 다른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는 배고픔의 트라우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기준에 얽매인 채 각박한 경쟁에 몰입되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인생의 골격과 꿈의 바탕이 형성되는 소년기를 앗아가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말자. 좋은 시절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보낸 세월은 잃어버린 세월. 간절한 염원의 봄이 아닌 만물이 생동하는 푸르른 그 본래의 봄을 준비하며 이 겨울을 즐겨라. 봄이 없는 곳도 있을진대 섭리처럼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을 가진 우리는 행복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