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문단 데뷔로 따져보면 내가 형보다 9년쯤 앞서 시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므로 뭐 조금 선배랄 수도 있을 것이오. 이렇게 시시콜콜 따져서 말하면 형이 코웃음을 치고 말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찌 하겠소.
S시인에게…
깡끼를 느끼게 하는 반골이며
한의 정서 구성지게 푸는 가객
첫인상 또한 정 깊은 모습이었소
섬진강가에도 새해가 왔을게요
마음의 혁신으로 월척을 낚으시오
형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실제로 형을 대면한 것은 1995년 5월 광주 문학행사 중 무등산 자락의 김현승 시비를 보러간 때가 아닌가 생각되오. 하지만 형과 내가 서로를 아주 친근하게 느끼게 된 것은 1997년 여름 유럽문학 기행의 일원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을 함께 여행한 것이 뚜렷한 계기가 되었소.
특히 '마담 보바리'의 작가 플로베르의 고향 루앙-이곳은 내가 유학생활을 한 곳이기도 한데-을 비롯해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무대인 노르망디 해안의 에트르타 바닷가 등을 누비면서 솔직한 내면의 나상(裸像)을 자연스레 드러냄으로써 바짝 가까워지게 된 것 같소.
형은 그 용모부터가 소탈하고 다부진 남도 토종의 '깡끼(剛氣)'를 느끼게 하는 옹골찬 반골의 사나이이오. 타고난 시적 기질 뿐만 아니라, 맛깔스런 음식에 대한 미각, 사람 상종의 태도, 그리고 생활 습성에 있어서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스레 밀고 가는 끈기를 보여주고 있소.
그렇다고 해서 형이 뻣시고 투박하기만 한 그런 꼴통이란 말은 결코 아니오. 형은 차라리 낭창낭창 휘어지는 버들개지의 여리고 유연한 성품의 소유자라 할 수 있소. '황토'를 먹고 자라나 '대(竹)'의 꼿꼿한 저항정신과 '뻘'의 모성적 물질상상력을 활달하게 펼치는 풍류객, 또는 유구한 한의 정서를 구성지게 풀어내는 드문 가객, 그가 바로 형일 것이오.
얼마간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풍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서 친구들이 재미로 내게 붙여준 '가림스키'라는 별명으로 형이 나를 부를 때면, 우린 백년지기라도 되는 양 금세 반말로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버리곤 하오. 난 그런 형의 소탈한 유머감각과 자연발생적 친화력이 좋소.
1995년 겨울쯤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다른 문우들과 어울려 변산반도 격포에 놀러갔다가 형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소. 채석강 파도를 안주 삼아 소주타령을 너무 지나치게 많이 한 탓에 엉망으로 속이 뒤집혀진 아침, 형이 복용하고 있던 보약 한 사발을 선뜻 내게만 권하던 장면이 떠오르오.
난 그때 꿀물 한 사발이라면 몰라도 자기가 먹는 보약을 뜬손님에게 아낌없이 주다니, 하고 생각했었소. 그때 이래 형은 대범한 마음의 품을 지닌 정 깊은 인형(仁兄)의 모습으로 내 뇌리에 새겨져 있소.
그때 이래 변산 채석강의 추억이 내 마음에 유난히 깊이 새겨진 탓인지, 온갖 것 다 털어버리고 갯메꽃 깔린 뻘밭에 홀로 서 있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살고 싶은 날이면, 형의 작품 중 '적막한 바닷가'를 떠올리게 되오.
더러는 비워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전남 광양시 염창마을 섬진강가의 어초장(魚樵莊)에도 계사년(癸巳年) 새해가 찾아왔을 것이오. 해가 바뀐다 해서 어제와 다른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희망을 품으며 확고한 실천을 다짐하는 마음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오. 올해도 시의 낚시질 부지런히 해서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할 월척을 낚길 바라오. 형의 힘찬 건투를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