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겸 한국학 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지난해 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출마한 후보가 몇 있었지만 유권자의 관심을 집중시킨 유력한 후보는 두 분이었고, 사실상 두 분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선거는 극심한 양자 대결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신라시대 상위계층의 대학자
합리주의 입각한 유교적 실천 노력
삶과 학문 일치된 모습 보여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도층
편협된 주의·완고한 명분 아닌
말·행동에 대한 신념·책임 필요


그 과정에서 사회지도층과 지식인이란 많은 사람들이 서로 두 후보를 지지한다고 표방하면서 이른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장마철의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시끄러웠다. 물론 여기에는 후보자의 정치적 성향, 정책과 공약에 뜻을 같이하여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반면 한편에서는 그저 주변 사람들이 다른 후보를 나쁘다, 비호감이라고 하자 그쪽에 부화뇌동해야만 지식인인양 착각하고 행동한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 한다.

평소 학문적 성향이나 언행으로 보건대, 저 사람이 저랬나? 그런가? 하고, 보는 이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한층 가관인 것은 이런 사람일수록 더 과격하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튀고자했다는 것이다. 신라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대학자요 문장가인 강수 선생이 계셨다.

그는 본디 멸망한 가야의 후손이었지만 신라에 들어와 골품제에서 6두품이란 상위 지배층에 속했다. '삼국사기'에는 강수가 어릴 적에 학문의 방향을 정할 때 있었던 아주 유명한 일화가 실려 있다.

아버지 석체 나마가 강수의 학문의 뜻을 알고자 해서 묻기를 "네가 불교를 배울래? 유교를 배울래?" 하니, 강수가 대답하기를 "제가 듣기로 불교는 세상 밖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오니 유학자의 길을 배우고자 원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관직에 오르고 학자로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한편 강수가 일찍이 신분이 낮은 대장장이 딸과 야합하여 둘 사이의 애정이 퍽이나 깊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부모는 강수의 나이 20세가 되자 용모와 행실이 아름다운 읍내 여자를 골라 중매를 통해 그의 아내로 삼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강수는 두 번 장가를 들 수 없다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에 부친이 화가 나 말하기를 "네가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도 모르는 이가 없는데 미천한 여인으로 짝을 삼는다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니, 강수가 거듭 절을 하고 말하기를 "가난하고 천한 게 수치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도리를 배우고도 옮기지 않음이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일찍이 옛 사람 말을 듣건대 조강지처는 버리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고 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장장이 딸과 평생을 같이 하였다.

강수는 출세한 뒤에도 조강지처는 불하당이라는 학문적 신념을 앞세워 결코 미천한 신분의 아내를 버리지 않고 인간적 도리를 다하였다. 강수는 훌륭한 문장가이면서 아울러 자신의 행위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명분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유교적 도덕률의 실천가였다고 평가된다.

또 신의를 중시하는 강수와 같은 면모는 대장장이 딸인 아내에게서도 함께 볼 수 있다. 뒷날 남편이 죽은 뒤에 있었던 행동에서 드러난다. 강수가 죽으매 장사 비용을 나라에서 주었다. 부의로 준 옷과 피륙이 대단히 많았으나 집사람이 그것을 사사로이 쓰지 않고는 모두 불사에 바쳤다.

기부 주체는 바로 강수의 아내였다. 아내 역시 강수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일찍이 강수가 불교는 이 세상 밖의 가르침이라 하였다. 이제 강수가 죽으니, 그의 아내는 남편 강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산을 불사에 시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수의 뜻이 아니었을까? 즉 살아서는 이 세상 학문인 유학을, 죽어서는 세상 밖의 불교를 좇겠다고 한 것을 강수 자신과 그의 부인이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식인과 지도층, 그 가족들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덕목은 바로 학문적 신념과 실천하는 행동이다. 말과 행동에 대한 최소한의 신념과 책임이 필요하다. 편협된 주의와 완고한 명분이 최고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식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