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의 한 시설원에서 세 딸과 함께 지내는 필리핀 출신의 다문화가정 박현주(46·가명)씨가 서툰 한국말로 잦은 폭력과 딸들에게 성추행을 의심케 하는 행동을 하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치듯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말하고 있다. /선보규기자

남편은 툭하면 손찌검이었다. 그놈의 돈이 '원수'였다. 필리핀 출신인 아내는 공장에 나가야 했다. 세 딸아이를 먹이고 입히려면 일을 해야 했다. 남편은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집에서 백수처럼 지낼 때가 많았다.

남편, 손찌검·딸에 몹쓸짓
아이들 데리고 결국 집나와
자활근로 하며 꾸준히 저축
필리핀 사는 아들과 살고파


그러면서도 아내에게는 돈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남편의 폭력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딸들에게 못된 짓을 하는 것 만큼은 용서가 안됐다. 아이들은 아빠 눈치만 살폈다. 무슨 일이냐며 어르고 달래 봐도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유일한 방법은 남편에게서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지난 11일 인천의 한 시설에서 세 딸과 함께 지내는 박현주(46·가명)씨를 만났다. 박씨는 한국말이 조금 서툴렀다. 그래도 일상적인 대화는 어렵지 않게 나눌 수 있었다. 박씨가 시설에 들어온 것은 지난해 5월이다. 그 전까지는 신발공장이 있는 건물 지하에서 살았다.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였다. 월세를 낼 돈도 다 떨어졌을 때 구청 도움으로 이 시설에 오게 됐다.

박씨는 손등에 큰 상처가 있었다. 다니던 공장에서 사고를 당했다. 프레스 기계에 눌려 뼈 마디가 다 으스러질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여기, 100원 동전, 그만한 거, 구멍 뚫렸어요. 지금도 날씨가 추우면 아파…." 박씨는 손등을 매만지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당시 박씨에게 나온 산재 치료비는 대부분 남편의 빚을 갚는데 썼다고 한다.

결국 박씨도 그렇게 일을 그만뒀다. 막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찌검만 더 늘었다. 박씨는 다시 2007년부터 자활근로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박씨는 그런 남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혼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남편이 들어줄리 만무했다. 박씨는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아이들도 커 가는데 한 푼이라도 더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그렇게 이혼을 했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은 제 집 드나들 듯했다. 그리고 폭력도 여전했다.

남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딸들 때문이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잠에서 깬 첫째 딸 미희(13)의 웃옷이 이상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마는 아이의 표정에서 무언가 잘못됐다고 직감했다. 미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아이가 그날 학교갔다가 밤늦게 집에 왔어. 11시30분에. 미희한테 '무슨 일이야. 엄마가 알아야지' 계속 말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옆에서 왔다갔다 하는 거야. 미희는 아빠 눈치만 보고. 둘째도 그런 적 있는 거 같아…." 박씨는 성추행을 의심했다.

그 길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남편은 박씨와 세 딸이 필리핀으로 떠난 줄 안다. 한 지인에게 그렇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단다.

세 딸은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갔다. 잃어버렸던 웃음도 되찾았다. 박씨는 자활근로를 하면서 매달 70만원을 받는다. 그리고 정부 지원금으로 나오는 약 50만원 돈을 살림살이에 보태 쓰고 있다. 박씨는 내년 5월 전까지 새 거처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저축을 하고 있다. 생활비를 쪼개 필리핀에도 돈을 보낸다. 고향에 두고 온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씨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한국으로 와 재혼을 했던 것이다.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을 데려와 함께 사는 게 박씨의 소원이다.

인터뷰 말미에야 박씨의 이름을 물어보게 됐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알려준 필리핀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박씨는 웃으며 박현주, 이름 석자를 댔다. 바로 며칠 전에 개명 신청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요. 세 딸이 있으니까. 필리핀에 아들도 있어. 열심히 살 거예요."

후원 문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인천본부(032-875-7010), 홈페이지(www.childfund-incheon.or.kr)

/임승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