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구 수원대 교수·객원논설위원
재작년 5월 스릴러 영화의 거장 커티스 핸슨 감독이 만든 '투빅 투페일(Too big to fail)'이란 제목의 영화가 출시된 적이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이 아슬아슬하게 수습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다큐멘터리 형식이었는데 리먼브라더스은행 파산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영원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세계 4위의 공룡은행이 한순간에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이 영화는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탐욕과 이를 부채질한 미국정부와의 야합이 빚은 범죄로 규정했다.

한국민들에겐 더 깊고 큰 상처가 있다. 1997년 1월 23일 한보그룹 부도로 표면화된 위기가 갈수록 확대되자 다급했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담보로 경제주권을 넘겼다.

IMF는 재정지출 축소와 증세, 은행 폐쇄와 금융긴축, 공기업 헐값 매각과 노동시장 유연화 등 규제완화를 요구했다. 30대 재벌의 절반이 좌초하는 등 2만2천여 기업들이 무더기로 부도를 맞았는데 그중 7천여 기업은 흑자도산했다.

무려 250만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대마불사신화에 도취된 수많은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돈을 빨아들여 몸집을 키운 것이 화근이었다. 작금의 양극화와 평생직장 종식, 경제불안 심화, 캔두(can-do)정신 실종 등은 16년 전 악몽의 유산(遺産)이다.

이 무렵 인도네시아는 IMF로부터 100억 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벨트타이트 프로그램을 강요받은 결과 1998년 한 해 동안에만 경제규모가 13%나 위축되었다. 태국도 수술후유증으로 극심한 몸살을 앓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당시 세계은행 부총재였던 조시프 스티글리츠 교수가 IMF의 초긴축처방이 그릇되었다며 목소리를 높였음에도 막무가내였다. 저금리에 근거한 빚잔치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 과감하게 척결했던 것이다. 국제금융자본의 진입장벽까지 일거에 허물어버렸다. 채무국들에게 소방수 IMF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저승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IMF에 이상기운이 감지된다. 지난해 10월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IMF총재가 뜬금없이 1990년대 말의 아시아외환위기 대처가 잘못되었다며 처음으로 실수를 인정한 것이다. 후임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한술 더 떠 독일의 시장근본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그리스 등에 강요하고 있는 긴축을 완화할 것을 촉구했다. IMF의 입장변화는 이론적 측면에서도 감지된다.

지난 3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AEA) 연례총회에서 IMF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올리비에 블랑샤르가 사견(私見)임을 전제로 유럽의 쥐어짜기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논증(論證)한 것이다. 재정적자 1유로를 줄이는데 따른 생산감소분이 1유로보다 더 크다는 것이 요지이다. IMF가 포르투갈을 비롯한 인근 국가들의 재정적자 목표를 완화한 것이 시사하는 바 크다.

블랑샤르는 미국의 재정절벽 해법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로 훈수했다. 미국도 유럽 국가들처럼 긴축은 불가피하나 추진속도를 늦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일 미국 의회는 개인소득 연 40만 달러 이상 계층에 한해 소득세율을 인상하고 정부지출 자동삭감 시한을 다음 달까지 연장하는 내용에 동의했다.

미국은 재정적자 규모가 물경 1조 달러로 세계최대임에도 초저금리의 빚의 향연을 묵인한 것이다. 살인적인 고금리로 국부(國富)를 거덜 냈던 아시아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미국과 유럽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터여서 함부로 허리띠 조르기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이다. 시장신뢰에 치명적인 대마불사신화가 금융의 본고장에서는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오죽했으면 헤지펀드의 귀재 조지 소로스가 "금융위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들에겐 금리를 인상하도록 하고 미국과 유럽에선 금리는 낮춘 것은 도덕적 해이"라며 날을 세우겠는가.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과거 혹독한 대가를 지불했던 금융약소국들만 억울하게 생겼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인 IMF의 두 얼굴에 실망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