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재 논설위원
요즘 전직 장차관들과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현직 고위공무원과 일부 정치교수들은 좌불안석이다. 외출할 때는 물론 사우나에 갈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휴대폰을 꼭 들고 다닌다. 집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잠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밥 먹을 때도 식탁 위에 두고 먹는다.

수신 확인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한다. 자칫 배터리가 방전되면 배고픈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외출시 예비 배터리 하나쯤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필수다. 이토록 휴대폰을 애지중지하는 것은 입각 소식이 날아올까 봐서다. 곧 총리가 정해지면 각 부처 장관들도 임명될 것이다.

혹시 자신이 낙점되었다는 연락이 왔는데 받지 못하면 거절하는 뜻으로 받아들일까 휴대폰에 목을 매고 기다리는 것이다. 권력의 맛이란 이렇게 무서운 법이다. 고기도 먹어본 자만이 맛을 안다고, 권력도 누려 본 자만이 그 맛을 알 것이다.

어려운 고시에 통과해 서기관이 되고 차관이 되고 장관도 하고 심지어 퇴직 후 국회의원이라는 덤까지 온갖 영화를 누리고도 은퇴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권력,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쳤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그토록 주구장창 권세를 누렸건만 불러준다면 당장 달려가고 싶은 게 권력의 속성이다.

징비록이 주는 교훈=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저민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좌의정이었다. 왕의 바로 옆에서 전란을 지켜본 최고 관직에 있던 사람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을 위해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던 비굴한 상황마저 정확하게 기록한 책이다.

또한 그의 눈에 비친 전란의 비참함, 문관, 무관들의 성향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순신에 대한 평가에 상당부분 할애한 것도 놀랍다. 그러나 유성룡은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고향 하회로 돌아가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징비록' 집필이었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당파간의 정쟁만 벌이지말고 또다시 닥칠지 모를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재상의 충언이자 고언이다. 뒤늦게 선조가 조정으로 복귀해 달라고 수차례 불렀지만 그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몫은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전란 중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다시 영의정에 오르는 우여곡절을 겪었던 그에게 더 이상의 관직은 무의미하고 허무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전란중 수많은 백성들의 비참한 주검을 직접 보았던 그가 더 이상 백성들을 돌본다는 것 역시 위선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징비록'을 대한민국 정치인들과 고위공무원들, 이번에 영광스럽게 입각할 공직자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권력보다 국민 생각 헤아리는게 중요=탕평인사라는 미명아래 전 정권하에서 수차례 장관직을 지낸 사람들의 이름이 총리, 장관 하마평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것은 우리나라의 비극이다. 더욱이 종편채널에 나와 얼굴을 알리고 어쩌구 저쩌구 떠들다 앵커가 "만일 전화 오면 가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어색한 웃음으로 어물쩍 넘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가증스러움을 넘어 소름마저 끼친다.

나는 그들이 후세를 위해 재임시 겪었던 일들을 진솔하게 책으로 집필했다는 소식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다시는 이런 우를 범하지 말라고 가감없이 재직시 실정과 실책을 솔직히 밝히는 전직 정치인, 장차관들이 왜 우리 옆에 없는 것인가.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고위공직자들의 말 한마디가 먼 훗날 후세에게 귀한 교훈이 된다는 것을 머리 좋은 그들이 모를리 없다.

자리 하나 차지하는데 자칫 책 한권이 걸림돌이 되는 것을 머리 좋은 그들은 우려했을 것이다. 운 좋으면 권력을 다시 잡아 몇 년간 행복할 수 있는데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400여년 전에 시골의 한 초가에서 쓰여진 '징비록'이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위정자들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하는 충신보다 일신의 영달에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 국민의 무너지는 한숨이 들리고, 쏟아지는 눈물이 보일 리 없다. '징비록'의 글귀 한줄 한줄이 오늘따라 너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