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총리는 학문적 용어도 법률 용어도 아니다. 총리가 헌법에 명시된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을 책임총리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데 사회통념적인 합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책임총리가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고 하는 것이 대체적으로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의 보편적 합의이다.
대통령제 총리위상 역할 제한적
통합과 공동체 지향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출과 효과 위해선
국민적 정당성 확보가 우선
존경과 신망 받는 인사 등용될때
국민 통합의 기초 이룰 수 있어
우리나라의 국무총리제도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헌법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국무위원의 인사제청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책임총리의 근거 조항이다. 총리가 내각을 통할하여 민생과 내치를 책임지고, 대통령은 외교나 국방 등의 외치를 맡는다는 권력 분산의 정신이다.
그러나 경제부총리가 경제부처를 장악하고, 유관한 업무 조정 능력을 갖게 되며 미래창조과학부가 과학과 기술부문을 총괄한다는 새정부의 조직개편은 원천적으로 책임총리라는 개념과는 상치되는 개념이다. 단순히 내각의 인사제청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책임'이라는 한정적 의미를 붙인다면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
총리의 인사제청권 행사는 대통령제하에서 원천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국민의 직접 선출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통령 권력과 비록 국회의 임명동의를 거친다고 하지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의중과 부합하지 않는 인사를 추천한다는 것은 상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총리가 각 부처의 상충되는 정책을 조율하고 부처이기주의를 조정하는 것도 총리실의 주요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총리실에 국무조정실을 부활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책임총리론'의 함의를 전제할 때,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의 기본 인선 방향을 가늠하는 최근의 총리담론은 어딘지 책임총리론과는 썩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법조인 출신의 총리 발탁과 법치와의 논리적 연관성은 피상적으로, 또는 형식논리적으로는 부합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 연계성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법의 공정한 집행과 정확한 적용이 '유전무죄', '유권무죄'를 추방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며, 총리가 법조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상징적 의미 이상의 의의를 부여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를 통합과 연관시키는 것은 정치적 상징의 뉘앙스를 풍긴다. 법치와 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법조인 출신이 총리가 되어야 법치가 선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총리의 정치적 의미가 통합형으로 한정될 때 이는 정치적 수사로서의 명분은 있으되, 실질적 측면에서 모호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관리형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관리한다는 것인가.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는 내각의 실질적 통할이라는 의미에서의 관리인지, 형식적으로 총리의 역할을 '선량한 관리자'로 국한하고, 상징적인 위치로만 자리매김 한다는 것인지 개념적인 선명성이 부각되지 않는다.
대통령제의 권력구조하에서 총리의 위상과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원천적으로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분산은 이원집정부제의 권력구조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법적·제도적 보완 없이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권력운용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명백한 한계속에서 총리가 통합과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에 상징적 효과라도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적 정당성의 확보가 우선이다. 이를 위해서 총리는 존경과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인사라야 한다. 그것이 통합의 기초다. 국민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삶의 궤적을 살아온 인사가 등용될 때 통합의 효과를 상징적으로나마 거둘 수 있다.
왜 통합이 중요한지,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가 자진사퇴할 때 언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이후 해명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절차적 하자가 없음을 주장한 것은 그래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