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재 논설위원
'만약에 이랬다면'이라는 가정법은 역사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은밀하고도 매혹적인 물음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디데이 하루 전날인 1944년 6월5일, 유럽 전역에 불어닥친 폭풍우가 갑자기 멈추지 않았다면? 그래서 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1973년 10월6일 욤 키푸르(대 속죄일)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시에 침공할 것을 알면서도 선제공격하지 않고 침공을 당했던 골다 메이어 등 이스라엘 수뇌부들이 만약 두나라를 선제공격 했다면? 그래서 전 세계로부터 침략국이라는 비난을 받고 결국 미국으로부터 군수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존재했을까?

하긴 멀리 외국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만약 지난 대선에서 야권이 안철수로 단일화가 이뤄져 안철수가 대통령이 됐다면 지금 정치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터무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만약 민주당이 이번 박근혜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안을 화끈하게 받아들여 그래서 큰 일 없이 무난하게 새 정부가 출범됐다면 눈치 빠른 안철수 전 교수가 노원병 보궐선거 출마 선언을 할 수 있었을까? 뭐 그런 식이다. 아니면 말고 식. 그러나 한번 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끔찍한 가정법 말이다.

언론계 종사자들의 평균수명이 가장 짧다는 의학계의 정설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갖는다. 지난해 대선이 끝난 후 어찌됐건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큰 정치적 이슈는 없어 좀 무료한 시간을 보낼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번 기회에 담배도 끊고, 어디 헬스클럽에 등록해 새록새록 불러오는 저 지방덩어리를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나라다.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나라다. 남이 편한 꼴을 못보는 독특한 민족성을 갖고 있는 나라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왠지 한번쯤 시비를 걸고 싶어하는 게 우리의 빛나는 민족성이다. 정치부 기자들의 편한 꼴을 그들이 봐줄리 없다.

담배를 피게 만들고 술을 먹게 만든다. 대선 패배의 책임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그 입을 다물고 당 결속에 매진해야 할 민주당이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정부조직개편안에 발목을 잡으면서 정국이 대혼란 속에 빠졌기 때문이다. 전도유망한 장관 후보자는 대한민국 정치판의 수준을 개탄하면서 스스로 장관직을 포기하고 출국해 버렸다. 취임한 지 8일 밖에 안 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은 대국민 호소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헌정 초유의 사태'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입 끝을 파르르 떨었다.

만약 민주당이 한번 봐주었다면. 눈 질끈 감고 화끈하게 밀어주었다면. 그런데 민주당은 그러고 싶지 않았나보다. 한술 더 떠 청문회에 나오는 장관 후보자에게 약을 올리듯 판에 박힌 5·16에 대한 반복되는 질문, 거기에 곤혹스러워 하는 장관 후보자들을 보며 비웃는 표정, 요즘 초등학생들이 사용하는 화법보다 낮은 수준의 말들을 늘어놓는 국회의원들의 짜증나는 어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만약 국회의원에게도 청문회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법을 만들어 거기를 통과해야만 금배지를 달아준다면? 만약 어떤 이유에서건 단 한번이라도 감옥에 갔다 온 사람은 평생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을 만든다면?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국민'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거다.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에 대한 혐오. 그런데 정작 국회의원들은 그것을 모른다. 만약 안다면? 국민들이 국회의원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부끄러워 할까.

지난 대선기간 종편채널 시사프로에 나왔던 진보 정치평론가들이 선거 후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시사프로에 하나 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의 절대적 우세를 장담했던 이들이다. 태생적으로 '촉'이 발달한 이들이 다시 슬금슬금 종편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 보궐선거의 판이 생각보다 무척 커졌다는 얘기다. 이번 결과에 따라 정치판은 합종연횡이 이뤄질 만큼 메가톤급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안철수 전 교수의 출마 선언으로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만약 안철수 전 교수가 당선된다면? 그래서 한심한 정치판을 갈아 엎자고, 당장 국회의원 수를 반으로 줄이자고 '국민'에게 호소한다면? 그래서 민주당이 해체된다면?

/이영재 논설위원